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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ㅣ자연ㅣ뉴스

궁예도성(弓裔都城)

by 라폴리아 2012. 7. 24.

현재 비무장지대인 철원군 철원읍 홍원리 일대....

고구려 부흥이라는 궁예왕의 야망이 서렸던 태봉국의 옛 도읍지가 있던 곳이다.

궁예는 효공왕 8(서기 904)에 국호를 마진으로 고치고 서기 905년 송악에서 철원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천도 당시에 도선의 도참설에 금학산을 진산으로 정하면 300년을 지속할 것이며, 고암산(김일성 고지)을 진산으로 정하면 30년 밖에 유지하지 못한다는 설이 있었는데 궁예는 이를 무시하고 고암산을 진산으로 정했다가 25년만에 패망했다고 한다.

도성의 테두리는 오른쪽으로 약간 기울어진 직사각형 모양으로 DMZ 안에 쏙 들어간 형태이며, 군사분계선(MDL)도성을 가로로 양분하고, 경원선 철도가 다시 세로로 갈라놓는다. 부하에게 쫓겨난 비운의 왕 궁예는 천년이 지난 후세에도 DMZ에 갇혀 꼼짝 못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고구려뿐만 아니라 신라, 백제, 만주와 연해주까지 아우르는 대동방국(大東方國)을 꿈꿨던 궁예의 원대한 이상은 이리저리 잘려나간 채 사람의 발길이 닿을 수 없는 미확인 지뢰지대 한 가운데 박제돼 있다. <고려사지리지(1454)> <신증동국여지승람'(1530)> 등에 궁예도성의 위치, 규모 등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다. 특히 일제시대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1942)>에는 성 안에 있던 연꽃무늬 석등(일제시대 국보 118호로 지정)과 귀부(거북 모양의 비석 받침돌) 사진이 실려있으나 DMZ 현장에서는 이를 찾아볼 수 없다.

문화재청도 그 자리에 넘어져 지뢰밭 수풀 속에 가려있거나, 전쟁통에 도난 또는 파괴됐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전쟁 전부터 그곳에 살았던 주민들은 도성의 당시 모습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1948년 가을 철원 월정중 교사 시절 여학생 40명을 데리고 궁예도성터에 소풍을 갔었다는 김영배(82·철원군 이길리)씨는

"국보급으로 보이는 석등이 한 귀퉁이가 깨진 채 넘어져 있었고 내성 근처에 기왓조각이 아주 많았다 농경지를 지나는 성벽은 거의 다 허물어졌고 내성 둘레에 오래된 소나무가 빽빽했다" 고 회상했다.

어쩌면 궁예는 천 년 후의 한반도를 내다봤던 것일까. 남한과 북한이 이 땅을 자유롭게 다니며 사라진 문화재와 성터를 조사하고, 반쪽씩 나눠 가진 도성의 비밀을 하나로 맞춰볼 날은 언제쯤일까. 궁예와 DMZ의 기막힌 인연은 그 위치 말고도 또 있다. 그는 나라를 세우기 위해 한반도 동쪽 끝 고성에서부터 서쪽 끝까지 이동하며 세력을 규합하고 영토를 장악했는데, 그 동선(動線)이 현재의 DMZ와 일치한다.

발해와 말갈이 막아서 더이상 북진할 수 없었던 궁예는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현재의 인제 화천 김화 철원까지 진출했고, 연천 파주 개성을 거쳐 서해 해상세력까지 손에 넣었다. 강원도 고성에서 경기도 파주에 이르는 이 <궁예 루트(route)>천 년 뒤 DMZ를 이루는 행정구역과 맞아떨어지게 된 것이다.

궁예는 여기에 나라의 국경선을 긋지 않고 위로는 황해도와 평안도까지, 아래로는 충청도까지 나아갔다. 북으로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고 남으로는 중국 일본으로 이어지는 해상권을 장악하려 했던 것이다. 한때 국호였던 마진(摩震)의 의미는 한반도의 허리에서 시작해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대동방국을 향한 궁예의 꿈이었다.

 

석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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