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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산춘추

한성근 장군 이야기

by 라폴리아 2016. 10. 11.

한성근 장군 이야기

 

사람은 산천, 기후, 풍토에 따라 그 타고나는 재능이 다르다. 문장과 글씨, 예술은 배워 이룰 수 있지만 용력과 지략은 하늘로부터 타고 나는 것이다빼어난 용력과 지략을 타고나는 사람은 천만 명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한다연개소문, 을지문덕, 김유신, 강감찬, 이순신, 김덕령 같은 선인들이 그런 분들이라 할 것이다. 이들은 산천, 기후, 풍토의 정기를 타고났을 뿐만 아니라 하늘이 뜻하여 국운을 바로 잡고 생령을 구하라고 보낸 하늘의 천사이다.

 

1833년 괴산군 칠성면 쌍곡리에 손가락을 꼽을 만한 큰 장사가 출현하였다. 바로 한성근 장군이다.

청주 한씨 집안에서 태어난 장군의 자는 원집, 호는 이력이다.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하여 온 집안으로, 청주에 살았다가 조부 때부터 괴산 칠성에서 살았다. 장군은 천 근이 되는 쇠로 만든 활을 당겨 500보 밖의 과녁을 맞추었고, 한 주먹의 쇠구슬을 입으로 뿜어 6간 대청을 쏘아 뚫었으며, 호랑이를 때려잡고 돈화문을 뛰어 넘었으며 총알이 몸에 침입하지 못하고 창검도 살에 들어가지 못하였다고 하니, 산을 뽑을 만큼 힘이 세었다는 항우도 장군보다 더 낫지는 않았을 것이다.

병인양요 때는 총알이 빗발치는 중에 홀로 프랑스군 수백명을 맨주먹으로 때려 죽이고, 세 번에 걸쳐 싸움에 나가 승전고를 울리며 돌아와 왕의 근심을 풀고 백성을 구하니 성총이 날로 더하고 명성과 인망이 자자하였다. 또한 천성이 너그럽고 충효로 근본을 삼으며 인의로 일을 처리하여, 높은 자리에 있되 시샘하거나 미워하는 사람이 없었고, 분수에 맞게 살아서 늙어서까지 부귀를 누렸다.

제갈량이 여섯 번 대군을 거느리고 기산을 나왔지만 병 들어 군중에서 죽었듯, 한 국가의 흥망은 하늘의 뜻이라고 한다. 그러나 장군이 살아 있을 때는 국운을 바로잡았고 나라가 치욕을 당하지 않았다. 1866년 이래 대원군이 정권을 잡고 쇄국정책을 하다가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이 일어나 유신당은 모두 해외로 나가버리고 정계가 점점 어둡게 흘러가자 1894년에 벼슬을 버렸다. 이와 같이 큰 인물이 우리 괴산에 아니 한반도에, 아니 동방에 나타났음은 우러러 감탄할 일이다. 

    

어느 날 장군의 어머니가 동해가 마르고 황룡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꿈을 꾸었는데, 그 후 잉태하여 열 달 후에 아이가 태어나니, 이 날 상서로운 기운과 좋은 향기가 집안에 가득하였다. 어린 아이를 살펴보니 눈은 호랑이요, 범의 머리처럼 머리가 단단하여 보통 아이와 달라 장군의 부모는 크게 기뻐하였다. 성근은 난 지 100일이 안되어 방안을 기어 다니고, 세 살 때 벌써 한 동이의 물을 거침없이 들었으며, 5~6세에 이르러서는 당할 아이들이 없었다. 7살부터 학문을 배우니 타고난 재주가 영리하여 하나를 들으면 열 가지를 알고 한 번 읽으면 그 내용을 모두 외워버렸다.

그러나 성근은 남자가 세상에 태어나 글만 읽고 세월을 보내면 언제 국가의 큰일을 감당하고 사람들을 구할 것인가?’ 하며 글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고 말 달리기, 헤엄치기, 활쏘기, 창쓰기만 좋아하였다.

 

그러다 어느날 갑자기 노자 한 푼 없이 집을 나섰다. 소백산, 속리산, 지리산을 구경하고 구월산, 묘향산을 본 뒤에 금강산을 구경하였다. 원래 근력이 장사인지라 도라지를 캐고 노루를 잡아먹기도 하고 절밥을 얻어먹기도 하였다. 하루는 금강산 최고봉 비로봉 위에서 내가 세상에 태어나 십수 해가 되도록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 천지가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더니, 오늘 보니 과연 조물주의 묘략과 우주가 넓고 크다는 것을 알겠다.” 하고 기암괴석과 여러 폭포를 구경하며 산을 내려가다 마하연 근처를 지나는데 갑자기 등 위에서 한 노인이 불렀다.

“얘? 어디로 가느냐?”

저는 정한 곳 없이 떠돌아다닙니다." 하니, 노인이 웃으며

네가 정한 곳 없이 다닌다 하니 그 뜻이 무엇이냐?”

제가 세상에 나서 천지의 넓음과 인정과 풍속을 모르므로 잠깐 사해를 두루 돌아다니며 둘러보고자 합니다.”

네 말을 듣고 보니 뜻이 크고 기상은 좋으나 처세하는 법을 학문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내가 너의 장한 뜻을 기특히 여기니 나를 따라 이 산 뒤 내가 있는 곳으로 가겠느냐?”

어른께서 가자고 하시는데 어찌 제가 사양하겠습니까?”

노인이 흔연히 성근의 손을 이끌고 한 곳에 이르니 산수가 아름답고 꽃과 풀들이 둘러싼 한 채의 집이 나왔다.

노인이 문 앞에 이르자 한 아이가 차를 달이고 있었다. 노인이 성근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늘 제자 하나를 얻어왔으니 나와 맞아라.”

아이가 스승의 명을 받들어 성근을 데리고 집으로 들어가니 방안에 책이 그득하였다. 또한 깊은 동굴과 계곡에 서기가 가득한데 뜰 앞 노송에 흰 학이 깃을 드리고, 돌문앞에는 사람들이 다니지 않아서 고요하니 참으로 신선이 사는 곳 같았다.

조금 있다가 음식이 나오는데 산에서 딴 과일과 풀만 가득했지만, 성근은 배가 너무 고파 사양하지 않고 먹은 후 노인이 주는 차와 과일을 먹고 나니 몸과 마음이 가뿐해지고 맑은 향이 코에 가득하였다. 잠시 후 단정히 꿇어앉아 노인에게

저는 떠돌아다니는 아이인데, 함부로 스승님의 귀여움을 입어 이곳에 이르렀고 좋은 과일과 차를 배불리 먹었으니 고마움을 어찌 표시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자, 노인이 웃으며 말하기를

이것 또한 전생의 인연이요 숙연이니 고마워할 것 없다하고, 책 한 권을 내어주며

네가 이것을 보겠느냐?” 하였다. 성근이 책을 받아 책장을 넘겨보니 지금까지 세상에서 보지 못한 글자였다. 성근이 두려운 마음에 엎드려 말하기를

제가 여러 해 동안 글을 읽었으나 이러한 글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하자 노인이 웃으며 말하기를

이 글은 둔갑할 수 있는 천서(天書). 이것이 인간의 문자와 같지는 않지만 앞으로 천지의 이치를 배우면 풀기가 쉬울 것이다.”

이에 말을 맞추고 자획에 따라 가르치니 몇 달 만에 한권의 글자를 거의 알게 되었다. 노인이 다시 글의 뜻을 풀이하여 현묘한 이치를 가르치니, 하나를 가르치면 성근은 열 가지를 알아 몇 년 동안에 천지, 음양, 순환의 원리와 인생, 화복, 윤회의 일을 다 알게 되었다.

노인은 다시 문밖을 나와 돌을 모아놓고 진세를 포열하고 나무칼을 만들어 매일 한 가지씩 반년을 가르치니 성근은 글과 무술을 함께 터득하게 되었다.

하루는 노인이 성근을 불러 앉히고

나는 봉래산신이다. 옥황상제의 명을 받들어 너를 여러 해 가르쳤더니 네가 글과 무술에 정통하여 더는 배울 것이 없으므로 너와 헤어져야 할 때가 되었다. 너는 섭섭하게 여기지 말고 산을 내려가 장수가 되고 재상을 하되, 충의를 근본으로 삼고 욕심을 멀리하여 늙어서 스스로 안락을 누리도록 하여라.”

말을 마치자 노인은 간 곳이 없고 바위굴에 장군 혼자 앉아 있었다. 크게 놀라 사방을 둘러보니 먼 산의 새소리는 석양을 재촉하고 깊은 골짜기 물은 봄날을 자랑할 뿐이었다. 성근이 일어나 하늘을 우러러 고마움의 절을 올리고 다시 바위를 향하여, 여러해 동안 가르침을 주신 은혜에 고마움을 표시한 뒤 산을 내려오니 이 때 성근의 나이는 19세였다.

 

성근은 내가 집을 떠난 지 벌써 3년이라 내가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랄 것이니 먼저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을 찾아뵙고 서울로 올라가서 내가 배운 것을 시험하자.’고 맘을 먹고 여러 날을 걸어 괴산으로 돌아보니 성근의 부모들이 반기며 손을 이끌고 들어가

네가 집을 떠난 지 벌써 3년이 되었다. 도대체 죽었는지 살았는지 몰라 밤낮 슬퍼하였더니 네가 이만큼 커서 돌아왔구나. 어디에 갔다 온 것이냐?”

성근이 엎드려

제가 어리석어 부모님께 여러 해 걱정을 끼쳤으니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하며 그동안 일을 낱낱이 말씀드리니 성근의 아버지는 비록 말은 하지 않았으나 마음속으로 매우 기뻐하며 내 집안을 빛낼 아이라고 생각하였다.

성근의 힘이 날로 늘어 큰 소의 싸움을 뿔을 잡아 말리고, 고목을 뿌리째 뽑아 옮기며, 곰과 멧돼지를 자주 집으로 몰아오니 마을 사람들이 모두 대장군감이라 하였다.

1863년에 서울에서 과거시험이 있다는 말을 듣고 성근은 부모님께

"제 나이 스물이 넘었고, 지금 서울에서 과거시험이 열린다 하니 제가한 번 응시하여 다행히 급제하면 집안에 영화가 될 것이고 만일 떨어지더라도 서울에 남아 기회를 봐서 몸을 국가에 바치고자 하오니 아버님도 밭을 팔고 서울로 이사하여 저의 앞길을 열어 주십시요."

하자 아버지가 기뻐하며 이를 허락하고 성근을 서울로 보냈다.

 

괴산에서 서울 300리길이 성근에게는 하루면 충분한 거리였지만 사람과 말을 따라가야 하므로 보통 사람과 같이 하루에 80리씩 가게 되었다. 며칠 뒤 안성에 머물렀는데 이 날 밤에 수십명의 도적이 여관에 침입하여 여러 나그네의 돈을 빼앗고 마을에 들어가 부녀자를 협박하여 소와 말을 빼앗아 물건들을 싣고 대담하게 큰 길로 나갔다.

이를 늦게 안 성근은 분노가 치밀어 맨주먹으로 혼자 도적들을 쫓아갔다. 성근은 칼과 창을 든 도적들을 순식간에 제압하고 손발을 묶어 길가에 두 줄로 꿇어 앉혔다. 그리고 우두머리를 향해 

"하늘이 뭇 백성을 낳으셨으니 사물에는 각기 정한 법칙이 있다. 각각의 물건에는 주인이 있고 나라 법이 있거늘 너희는 거저 입고 먹으며 국법을 무시하고 폭행을 저지르니 죄상으로 하면 죽여 아깝지 않으나 내가 지금 과거시험 보러 가는 길에 너희를 죽이는 것이 좋지 못하여 목숨을 보존케 하니 이 자리 에서 잘못을 뉘우쳐 사농공상의 직업을 가지고 악한 마음을 씻어버려 착한 사람이 되게 하라."

하자, 도적의 우두머리가 머리를 숙이고 엎드리며

"제가 낮은 데서 커서 배운 것이 아무것도 없고 변변하지 못한 근력을 믿어 도적의 무리를 이끌고 여러 해 동안 의롭지 못한 일을 하였으니 죽어도 안타깝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다행히 장군을 만나 뵈오니 어린 아이가 부모를 대함과 다름이 없을 뿐더러 여러 생명들을 살려주시는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저희들이 은덕의 만분의 일도 갚기 어려우니, 이제 무리를 흩어 각기 직업에 힘쓰게 하겠습니다. 저는 장군 아래에 들어가 채찍을 잡고자 하니 옛날 관공이 주창을 거두심을 생각하셔서 근본이 다르다고 내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너의 바램은 아직 늦지 않았거니와 네 아랫사람들은 빨리 흩어지게 하라."

이 말을 듣고 도적의 우두머리가 아랫사람에게

"너희는 다 착한 사람들이다. 너희들을 꼬드겨 지난 날 나쁜 일을 많이 하게 하였으니 이는 나의 죄로써 너희들한테까지 이르렀다. 옛말에 사람에게는 누구나 다 잘못이 있지만 고치는 것을 귀하게 여기라 했다. 너희들은 각기 고향으로 돌아가 농사를 짓고 장사하는데 힘을 다하여 위로는 부모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아래로는 처자의 근심을 풀어라. 만약에 다시 남의 재물을 빼앗고 어긋난 일을 하다가는 낱낱이 때려 죽여 가족도 남기지 않을 것이니 오늘 내가 하는 말에 따라 농사지으러 갈 사람은 오른쪽에 서고 장사하러 갈 사람은 왼쪽에 설 것이며, 농사나 장사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사람은 움직이지 마라."

도적의 우두머리가 명령을 내리자 도적들은 '옛날부터 산 속의 도적은 모두 농민'이라는 말처럼 모두 오른쪽으로 서니 모두 고향으로 흩어졌다. 성근이 여관으로 돌아와 수령을 시켜 빼앗은 물건들을 하나하나 날라서 피해자에게 나눠주고 다음 날 서울로 향하는데 수령도 동행하기를 원했으나 좋은 말로 위로하고 뒷날을 기약한 다음 말을 달려 홀로 서울로 올라갔다.

 

과거시험이 가까워지자 전국에서 온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드니 남대문 밖에 점집이 많이 늘었다. 당락을 점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성근도 복채를 놓고 점을 보았다. 점쟁이는 점통을 들고 한참 신명에게 빌더니 괘 하나를 빼어들고는

저는 눈이 없어 앞을 보지는 못하나 50년 동안 복술로 사람들의 길훙화복을 바르게 말해오고 있습니다. 오늘 선비의 괘를 보니 평생에 처음 뽑은 괘입니다. 귀인이 빼어난 말을 타고 왕기를 띄고, 관귀와 부모가 서로 붙잡고 월건과 일진, 월건과 일진이 상생 상합하였으니 장상의 징조요, 부귀를 누릴 점입니다. 부디 자중하십시오.”

하고, 글 한 수를 외워주니

自火至土 破寇滅敵 (자화지토 파구멸적)  불에서 흙에 이르기까지 외적을 깨뜨리고 적을 멸하다가

 逢癸而止 遇島而眠 (봉계이지 우도이민)   계년을 맞이하면 벼슬길에서 물러나 섬으로 들어가 편안히 쉬어라

 

성근은 글을 기록하여 옷 속에 품은 뒤 점쟁이에게 사례하고 남촌에 사는 친지의 집에 들어가 편히 쉬었다. 과거 보기 전 날, 짐꾼이 꿈을 꾸니 시골집 뒤뜰에 황룡이 서렸는데 앞으로 달려들어 여의주를 빼앗았다. 꿈을 깨어 생각하니 좋은 일이 있을 큰 꿈이라. 아침 식사를 한 뒤에 과거장에 들어가서 글 한 장을 지어 첫째로 글을 올려 장원급제하였다.

이튿날 성근은 조복을 갖추고 임금 앞에 나아가 절을 올린 뒤에 어사화를 머리에 꽂고 궐문 밖을 나서니 은패 청개는 앞에 서고, 비단옷을 입은 화동은 뒤로 늘어서서 옥으로 만든 젓가락을 희롱하며 큰 길로 나가니 그 위용의 찬란함을 사람마다 부러워하였다. 서너날 뒤 장군은 정부의 수유를 받아 고향에 돌아와 선영에 소분하고, 부모님을 서울로 모셨다.

 

다시 여러 달 뒤 철종이 승하하고 고종이 임금에 올랐다. 이 때 장군은 통덕랑 행봉상시봉사로 있었는데, 공무를 본 다음에는 틈틈이 귀족과 권세 있는 집을 찾아가 교분을 쌓았다. 그 중 판서 민영익, 윤웅렬, 이범진, 조희일 등 여러 대신들과 가깝게 지냈다.

하루는 판서 민영익이 장군의 용력을 시험하기 위하여 큰 연회를 준비하고 장군을 초대했다. 여러 손님들이 각기 음식상을 받았는데 성근의 밥상은 특별히 크고 많았다. 쌀밥 한 솥에 고기 한 양푼, 갈비찜 한 그릇 등 여러 반찬을 큰 교자상에 가득 차린 것이다. 장군은 이것을 보고 놀라 민영익에게

사람은 똑같고 식량도 또한 같거늘 내 상은 제일 크고 많으니 이게 무슨 일입니까?”

여러 사라들이 장군의 식사량을 한 번 보기를 원함이니 사양하지 마십시요.”

장군은

내가 소나 말이 아닌 이상에야 어찌 이것을 다 먹겠소?”

라고 말하였다. 민영익이

장군의 식사량이 많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것이니 굳이 사양 마시오.”

하였다장군이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 음식은 수십 명이 먹어도 남는다. 내가 다 먹으면 소의 배를 가졌다 할 것이고, 다 먹지 못하면 기운이 꺾일 것이니 내 어찌 되었든 먹어봐야겠다.’ 하고 두 소매를 걷고 수저를 손에 들었다.

다른 손님들은 모두 놀라 자기 음식은 먹을 생각은 않고, 모든 눈이 장군의 밥상으로 쏠렸다. 잠시 뒤 한 솥밥과 국 한 양푼을 비우고 나서 그만 상을 물렸다. 이 때 장군은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장군이 비스듬히 벽을 의지하여 담배 한 대를 피웠더니 그 동안에 음식은 벌써 소화되어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손님들은 모두 서를 보고 놀라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 말이 차츰 서울의 남북으로 알려져서 장군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1865년 봄에 장군은 군기시찰관의 임무를 띠고 수원을 가게 되었다. 이 때 수원 유수는 이경하였고 그 아들 이범진도 수원에 있었다. 장군은 친한 친구를 한시라도 빨리 가서 보고자 흰 말을 이끌고 동작나루에 다달아 뱃사공을 재촉하여 강은 건너기 시작했다. 배가 중간쯤에 이르렀는데 배를 탄 곳에서 건장한 사람들이 각기 머리를 누런 수건으로 묶고 곰방대를 입에 물고 뱃사공에게 손짓하여 배를 다시 돌리게 하였다. 뱃사공은 놀라서 뱃머리를 돌리려 하였다. 이에 장군이 크게 화를 내며 뱃사공을 꾸짖었다.

이놈! 너희들이 벼슬아치를 인도하여 강을 절반이나 건넜는데 중간에 갑자기 돌리고자 하니 이는 무슨 이우인가?“

뱃사공들이 모두 배 가운데에 엎드려 말하기를

저희들이 어찌 관행을 늦추고자 하겠습니까마는 저 무리들은 소위 마포의 여덟 장수라 기운이 세고 술 잘 마시고 사람을 잘 치고 싸움을 잘하여 한강, 용산, 마포, 서강으로 돌아다니며 나쁜 짓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감히 입을 열어 따질 사람이 없고 또 뱃사람들이 그들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배를 들어내 육지에 세우거나 배 밑판을 베어 놓아 다시는 쓰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니 식구가 먹고 살 계책 없이 하루아침에 거덜 날 판이라 복종하고 삽니다. 바라건 대 영감은 저희를 불쌍히 여겨 남은 목숨 건져 주십시오.”

장군은 사공들의 말을 듣고 분통함을 이기지 못하여

후환은 내가 감당할 것이니 너희들은 마음 놓고 배를 빨리 저어라.”

사공들이 감히 배를 돌리지 못하고 노를 저으니 여덟 사람이 또한 크게 화를 내며

이놈들아! 너희들이 감히 우리 명령을 거스르고 배를 돌리지 않으니 너희들의 제삿날은 바로 오늘이다.”

하고 장군을 향하여 욕설을 퍼붓더니 다른 배를 잡아타고 뒤쫓아 왔다.

성근은 매우 화를 내며

"누가 나를 욕하였느냐?"

여덟 명이 모두 달려들어 장군을 에워싸고 곰방대의 담뱃불로 성근을 겨누면서 서로 자기가 욕했다고 하였다. 이게 바로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고, 장군은 도리없이 두들겨 맞을 상황이었다. 사공들도 모두 벌벌 떨고 앉아 있었다. 이때 장군이 크게 소리지르며 오무렸던 팔을 한 번 활짝 펴니 여덟 명은 장작 쓰러지듯 한꺼번에 모래밭에 엎어져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다. 장군은 한 놈씩 발목을 잡고 모래밭에 내던지니 모두 수백 걸음 밖에 떨어져 정신을 잃었다. 그렇게 한 뒤에 장군은 말을 타고 주막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한참 뒤 사람들이 반쯤 죽은 시체 여덟을 들것에 메고 주막에 이르렀다. 그들은 힐끗 장군을 알아보고 엎드려 용서를 빌었다. 그러자 장군은 크게 그들을 꾸짖으며

"너희 쥐 같은 무리가 감히 용력을 자랑하고 나쁜 짓을 하여 사람들에게 많은 해독을 끼쳤으니 마땅히 법으로 다스려 나중에 일어날 잘못을 없애야 할 것인데, 인생이 불쌍하여 아직 목숨은 붙여 주거니와 다음에 이와 같은 짓을 하면 결단코 때려 죽일 것이다."

그들이 물러간 뒤에 장군은 다시 말에 올라 수원으로 내려갔다.

 

이튿날 장군이 부중에 들어가 군기를 두루 시찰하고 객관에 나와 앉았더니 이범진이 찾아와서 늦도록 이야기를 나누다가

"영감은 용력이 뛰어나니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겠지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무서운 것이 많지요. 하늘이 무섭고, 사람도 무섭고, 법도 무섭소."

"귀신은 무섭지 않습니까?"

"귀신은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귀신을 보시겠습니까?"

"나는 장력이 세지 못하여 보지 못했습니다. 대관절 귀신이 있는 곳이 어딥니까? "

"우리 고을 객사요"

"객사에 무슨 귀신이 있다는 말씀입니까?"

"모르지요. 사람마다 밤에 혼자 못들어가지요."

"큰 집이 오래비게 되면 음습한 기운이 몰려 도깨비 불이라는 것이 있다고 하지요."

"도깨비 불이라면 무가 무섭겠습니까마는 사지와 육체가 멀쩡한 귀신이 덤빈답니다."

"누가 더러 만나 보았습니까?"

"전설에 수 백년 전에 담력 센 사람이 한 번 들어갔다가 쫒겨 나왔다고 합니다."

"그것은 헛소립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면 영감과 내가 한번 내기를 해봅시다. 영감이 만일 오늘밤에 혼자 객사에서 자고 오시면 내가 크게 한턱을 내겠고, 영감이 만일 쫒겨 나오시면 내게 한턱을 크게 내시요?"

"그거 좋은 말씀입니다. 그러면 내가 오늘 잠에 들어가 자 보겠소."

이범진이 크게 기뻐하여 즉시 사람을 불러 동헌 객사를 깨끗이 한 뒤 이부자리를 갖춰주고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저녁을 마친 후 장군은 이범진과 헤어지고 타고왔던 백마는 대청 아래 버드나무에 매고 동헌에 앉았다.

때는 춘삼월이라 동풍은 온화하고 화음은 적적한데 서쪽 하늘에 지는 밝은 달은 산꼭대기에 걸려 있었다. 장군은 혼자 촛불을 돋우고 옛 책을 보다가 밤이 차차 깊어지면서 앉은 자리에서 잠깐 잠이 들고 말았다. 그러나 귀신 보기를 바랬던 장군이라 깊은 잠은 오지 않는다.

어렴풋이 잠결에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 얼른 눈을 뜨고 귀를 기울이고 자세히 들으면 아무 소리도 없고, 눈만 감으면 또 들렸다. 이러기를 수 차례, 그럭저럭 밤이 깊어 삼경이 지나자 마자 밖에서 신발 끄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는 아마 귀신이 오나 보다 하고 장군은 일어나 앉았다. 그 때 갑자기 어지러운 바람이 일며 촛불이 꺼지려다 다시 밝아지는데 하얀 옷을 입은 여인이 문을 열고 들어와 앉아 장군에게 예를 올리는 것이었다. 장군은 부드러운 말로

"부인은 뉘신데 깊은 밤 삼경에 남자 혼자 앉아 있는 방에 허락도 없이 들어오셨습니까?"

여인이 눈믈을 흘르며 슬픈 목소리로

"저는 사람이 아니라 귀신입니다. 병자년 호란에 피난하다 불측한 도적에 겁간을 당하고 살기가 부끄러워 객사 뒤뜰 나뭇가지에 목을 매고 죽었습니다. 그러나 깊은 한이 뼈 속까지 차서 원혼이 흩어지지 않으므로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고자 들어오면 사람마다 놀라 죽어 수백여년 오늘까지 원한을 말하지 못하였더니 지금 다행히 장군을 뵈옵게 되어 죽은 부모를 다시 뵙듯 기쁨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러면 부인의 성씨는 무엇이며 남편 이름은 무엇입니까?'

"저는 경주 김씨이고 남편은 본군의 부호로 이름난 이정언입니다."

"그러면 내가 밝은 날에 유수에게 알려 나라에 장계하고 부인의 원한을 풀어드릴 것이니 너무 슬퍼하지 말고 돌아가 기다리시요."

부인은 여러 번 고맙다고 하며 문을 나갔다.

장군이 다시 책을 보려고 하는데 이번에는 갑자기 대청 뒤로부터 창검 소리가 들리며 한 비범한 장사가 철갑을 두르고  긴 칼을 들고 방문을 열고 들어와 서 고개를 숙이는 것이었다. 장군은 일어나 맞이하며

"장사는 누구시기에 깊은 밤 사람 자는 방을 허락없이 들어왔습니까?"

그 장사가 공손히 대답하되

"저는 임진년 때 힘 깨나 쓰는 사람으로 이름난 김덕령입니다. 간사한 신하들이 헐뜯어 죄 없이 극형을 당하고 오랫동안 우주에 사무쳤으나 오히려 왕기 근처를 떠날 수 없어 수원에 머물렀는데 오늘 보니 장군은 위력이 세상을 덮는 영웅입니다. 능히 오랑캐를 무찌르고 나라에 큰 공을 세울 것 같아 우러러 공경하고 부러워함을 이기지 못하여 잠깐 존안에 절을 하고자 왔습니다."

말을 마치고 김덕령은 크게 소리를 내며 어디론가 사라졌다.

멀리 닭 우는 소리가 들리도록 더는 괴이한 일이 없자 장군은 베개에 의지하여 동방이 밝는 줄 몰랐다. 이튿날 범진은 일찍 일어나 장군을 찾으러 객사에 이르니 삼문이 굳게 닫혔고 인적이 고요하였다.

범진은 한편으로는 의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두려워 혼잣말로

"성인의 말씀에 '귀신의 덕은 참으로 지극하다'고 하였으니 사람 용력이 아무리 장하기로 귀신을 어찌 다스릴 수 있겠나. 내가 어제 이치에 맞지 않는 내기를 하여 나라의 동량을 위험한 곳에 넣었지만 설마 한장군이 죽기야 하였을까. 중용에 '신이여 오시는군요. 그 모습 헤아릴 길이 없는데 어찌 감히 역겨워 하겠습니까?' 하니 밤중에 사람이 없는데 요사스런 귀신으로부터 해를 받을 리 없겠지?"

이 같은 천 갈래 만 가지 헤아림이 범진의 머릿속에 한 가지 연극을 꾸미게 했다. 잠긴 문을 열고 동헌에 다다르니 이때 장군도 기침을 하고 있었다. 범진은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한달음에 뛰어들어 장군의 손을 잡고 반갑게 물었다.

"밤에 얼마나 놀라셨소?"

"놀랄 일이 있어야 놀라지요."

"영감은 속이지 마시요. 내가 두 번이나 혼이나서 다시는 못들어갔소."

'영감이 먼저 옛날에 혼난 말씀을 해보십시요."

"내가 이제 말하지만 첫번 때는 아랫사람을 데리고 들어왔다가 한 밤을 못 지내고 쫒겨나왔고, 두번 째는 혼자 들어왔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하고 밤중에 담을 넘어 달아났소."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놀라셨소."

"기가 막혀 말할 수가 없소. 첫번에는 사방 벽 틈에서 어린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리더니 나중에는 많은 군사와 말들이 뛰어 들어오며 무슨 짐승인지 입을 벌리고 들어와 날카로운 발톱으로 옷을 긁는 바람에 문을 차고 뛰어 나왔습니다."

장군은 크게 웃으며 겪은 일을 말하니 범진은 크게 놀라며 이로부터 더욱 공경하며 우러러 보았다.

 

장군이 손과 얼굴을 씻고 뜰에 내려 살펴보니 어젯밤 동헌 앞에 매어 두었던 백마가 없어졌다. 장군이 괴상히 여겨 스스로 이 구석 저 구석을 샅샅이 찾아보았다. 그런데 말이 문간방 벽장 속에 들어가 꼼짝도 못하고 꼭 끼어 있었다. 장군이 놀라 '이런 변괴다 있나. 저 큰 말이 어찌 이 작은 벽장에 들어갔지? 이게 도깨비 장난인가 보다. 어쨌건 내가 꺼내봐야겠다.' 하고 벽장문을 열고 말 목을 잡아당겼으나 벽장문이 좁아 도저히 끌어낼 수가 없었다. 장군은 도리없이 문설주를 뽑아내고 간신히 말을 빼내었다.

이 광경을 본 범진과 지나는 사람들은 모두 크게 놀라 구 뒤로부터는 낮에도 객사에 들어가기를 더 무서워하였다.

장군은 말을 빼내고 탄식하기를 '나는 벽을 헐고 말을 간신히 빼냈는데 도깨비는 문 한 짝 안건드리고 고삐를 집어넣었으니 도깨비의 재주는 내가 당하지 못하겠다.'하고 말을 끌러 관역으로 나왔다.

아침 식사를 마친 후 장군은 부중에 들어가 유수를 보고 열녀 김씨를 장계하여 관도 남쪽에 비석을 세워 그 정절을 포장하게 하고, 장군은 스스로 화산 상봉에 올라 정결한 곳을 가려 제단을 모아 술과 과일, 말린 고기와 식혜로써 김덕령 장군 설위 아래에 앉아 향을 피우고, 두번 절하고 축문을 읽었다.

"유세차, 을축년 3월 일에 시찰관 한성근은 때에 맞는 전을 갖추어 충장공 김덕령 장군의 영전에 알립니다.엎드려 생각해보니 존령의 무예는 만고에 뛰어나고 문장은 그 시대에 드날려 붓을 잡고 글을 써서 문장을 이루면 모든 사람들이 양보하고 뜰에 올라 크게 명령을 내리면 삼군이 무서워 떨더니 출사한 지 오래지 않아 아첨하는 신하들의 거짓말에 의해 큰 공을 이루지 못하여 먼저 흉변을 당하니 천지가 참혹하고 암담하며 해와 달이 빛을 잃었습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재빠르지 않는데도 오히려 기내를 지키시니 장군의 충성과 용맹은 관왕에게 부끄럽지 않습니다. 3백년 뒤 후생 성근은 장군의 역사를 볼 때에 더 할 수 없이 슬퍼서 괴로움을 누르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어젯밤에 다행히 장군을 모셔 과거의 지나온 일과 현재의 충직한 말을 자세히 듣고 보니 간담이 찢어지고 심신이 어지러워 끓어오르는 분노를 견디지 못하였습니다. 그러하오나 지난 일은 이미 지나갔기 때문에 말씀할 것이 없으니 바라건대 존령은 오래된 원한을 푸시고 스스로 누그럽게 다스리셔서 나라를 음으로 도와주시고 후생을이끌어 주십시요. 오호 슬프구나. 상향"

축문을 읽고 나자 파랗던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끼고 바람이 크게 일더니 신장이 제단에 이르러 흠향하는듯 하였다. 장군은 정성스레 제사를 마친 뒤 산에서 내려와 유수 부자와 헤어지고 이튿날 귀경하였다.

 

선왕 순조 때부터 조선에 천주교가 전해졌는데 철종 조에 이르러 교도가 점점 늘어나고 고종 황제 등극시에는 전국에 천주교도가 수만 명에 이르렀다. 또 궁중에서는 유모 박씨가 먼저 신도가 되어 교회에 드나들었더니 차차 궁녀들과 옆 궁궐까지 퍼져 활과 칼이 있는 곳까지 성경소리가 들리고 신부도 궁중에 드나들게 되었다. 이때 마침 러시아 순양함 한 척이 원산에 들어와 우리나라와 통상하기를 요구하니 서양 군함이 조선에 들어오기는 이때가 처음이다.

이 기회를 타서 교도 중 승정원 승지 남종삼과 홍봉주, 이신규 등이 유모 박씨를 올래 만나 밀계를 드리니 이 때가 1866년(병인) 2월이었다.
< 지금 러시아가 블라디보스토크를 개항하고 조선을 병탄하기 위해 먼저 군함능 보내이 그 뜻이 매우 악한지라, 우리나라의 군기와 전선이 러시아와 같지 않아서 스스로의 힘으로는 능히 막기 어려우니 빨리 영국, 프랑스에 구원을 청하여 함대를 조선에 보내게 한 뒤 사졸을 교련하고, 무비를 확장하여 밖의 적을 막으소서.>
하니 대원순이 그 계책을 거짓 허락하고 사람을 놓아 선교사를 묶어 프랑스 측의 내용을 정탐하였다. 이때 프랑스군은 베트남을 공격하여 양토를 늘리고, 각처의 선교사에게 머물고 있는 나라의 강약과 허싱을 몰래 정탐하던 중이었다. 마침 이때 러시아 순양함 한 척이 원산에 들어옴을 기회로 여겨 선교사 장경일 등이 천주교 신부를 속여 이 같은 밀계를 드리게 한 사실이 들켜버렸다.
대원군은 이 말을 듣고 크게 화가 나서 좌포장 이경하로 관군을 지휘하여 남종삼을 비롯해 프랑스 선교사 14명을 죽이고 밤낮으로 천주교도를 찾아 수만 명을 죽이니 그들 중에는 원한을 가진 사람도 많았다. 이 때 프랑스 선교사 리델 등이 몰래 달아나 중국 천진으로 가서 프랑스 해군 제독 로제에게 원통함을 하소연하였다. 로제는 크게 놀라 이 사실을 프랑스 본국에 보고하고 복수하기를 요청하였다.


많은 사람을 죽인 대원군은 후환을 염려하여 요새에 포대를 세우고 군기를 만들며 마군, 보군, 수군을 매일 훈련하여 싸울 중비를 마쳤다.
1866년 9월, 본국의 허락을 받은 프랑스군은 함선 세척을 이끌고 서울이 가까운 양화진에 정박하여 군사를 상륙시켜 여러 곳에 불을 지르니 불꽃이 하늘에 오르고 포성이 크게 일어 주민들은 다투어 피난하고 성안 민심이 흉흉하였다.
이때 장군은 관군 3천명을 거느리고 순무사 이경하와 협력하여 뭍으로 올라온 프랑스군 수백명을 내쫒고 프랑스 함정을 포격하니 프랑스군은 조선의 자리에 익숙하지 못하고 관군의 숫자를 몰라 감히 대응하지 못하고 닻을 놀리고 달아나 버렸다.

장군이 프랑스 군함을 물리치고 돌아오니 조정과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고 인심이 안정되어 프랑스군의 능력이 없음을 업신여기고 별로 준비를 하지 않았더니, 10월에는 다시 로제가 베트남에서 군함 7척과 수륙군 수천명을 나누어 싣고 중국 연태를 거쳐 강화도에 정박, 초지진과 광성보를 무너뜨리고 육군 수백명을 뭍으로 올려보내 통진을 습격하니 강화 유수 이인기와 통진 부사 이공렴은 성을 버리고 서울로 달아났다. 전 병조판서 이시원은 약을 마시고 죽었으며, 진을 지키던 장졸들이 많은 죽임을 당했다. 백성은 각자 살 길을 찾아 임진강 이남에 피란민이 길을 덮어 올라오니, 조정과 백성들이 크게 일어나 팔도에 격서를 전하여 의용병을 모집하고, 군관을 보내 프랑스군을 막을 준비를 하였다.

당시 관군의 우성봉은 양헌수, 좌선봉은 어재연이었다. 각관 관병 2천명을 거리느리고, 양헌수는 육군을 쫓아 통진으로, 어재연은 프랑스 수군을 쫓아 강화로 나아갔다. 어재연이 먼저 갑곶에 이르러 프랑스 군함을 포격하니 이 때 프랑스군의 무기는 모두 신무기였고 관군의 무기는 오래된 것이어서 관군이 크게 무너지니 어재연이 남은 병사를 거느리고 정족산성으로 돌아왔다.

관군이 졌다는 보고가 계속 조정에 당도하니 대원군이 크게 놀라 문무백관들을 모아 프랑스군에 대할할 장수를 고르게 되었다. 여러 사람이 말없이 앉아있기만 할 뿐 서로 천거를 하지 못하자, 장군이 기호연해 순무영 겸 차초관으로 나가서 싸우기를 자청하매, 대원군이 크게 기뻐하여 바로 장군을 유격장군으로 삼고, 남한산성 별패군 2백명과 황해도 곡산의 1백명을 주며 먼저 프랑스 육군을 막게 하였다. 장군은 3백명을 거느리고 통진으로 들어가 문수산성을 지키게 되었다.

이때 프랑스 육선대는 벌써 보트를 타고 문수산성 서문 아래에 모여 오르려고 하였다. 장군은 사졸을 지휘하여 성 위에 올라 일제히 사격하여 군함 2척을 침몰시키고, 다시 상륙한 프랑스군 수십명을 사살하였다. 포연이 자욱한 가운데 프랑스군 대대는 교묘히 성 아래로 몰려 성 밖을 안고 돌아 개미 떼와 같이 서남으로 쳐들어가게 하는 한편 포탄을 비오듯 퍼부우니 모두 동쪽의 통진으로 달아났다.

장군은 장수 넷을 데리고 프랑스군과 대적하게 되었지만 네 장수는 프랑스군이 쏜 총탄을 맞아 전사하고 장군을 총 한 자루만 쥐고 있었다. 밀물처럼 밀려드는 프랑스군을 혼자 막는다는 것은 불가항력이었다. 그야말로 산성의 무너짐이 일촉즉발 위험한 중에 장군은 더욱 정시을 차리고 성문뒤에 숨어 프랑스군이 들어오는 대로 주먹을 들어 치니 프랑스군은 하나같이 한 번에 머리가 부서지며 즉사하였다. 이와 같이 수백명을 때려 죽이니 프랑스군의 시체가 산처럼 쌓이고 피가 강물을 붉게 물들였다. 아무리 타고난 장사이기로 이에 이르러서는 기운이 다하여 장군은 한 번 몸을 솟구쳐 성벽을 넘어 높은 곳에 이르니 프랑스군은 장군을 향하여 총을 쏘아댔다. 이때 장군은 탄환 수백발을 맞아 갑주에 총알 구멍이 가득했고, 망건 편자에 총알이 붙어 철투구를 쓴 것 같았다.

장군은 너무 힘에 겨워 잔디밭에 드러누웠다. 프랑스군은 장군을 쫒고자 하였으나 수십장 높이의 절벽에 발을 붙일 것도 없고 큰 강이 아래로 흘러 감히 뒤따르지 못하고 성 안으로 몰려들었다. 장군은 다시 몸을 일으켜 프랑스군을 향하여 총을 4~5발 쏘다가 총알이 다 되어 성을 돌아 통진으로 들어와 양헌수에게 지금까지의 일을 말하니 양헌수가 크게 놀라 장군을 위로하고 이로부터 장군을 더욱 우러러 보았다.

점심을 마치고 장군이 군사를 헤아려보니 3백명 중 전사자가 한 명도 없었다. 이에 장군이 크게 성을 내며 군사를 좌우로 갈라 세우고 추상같이 호령하였다.

"나라가 병사를 천일 훈련시키는 것은 한 번 쓰기 위함이다. 나라가 너희들을 기른 까닭은 어려운 때를 당하여 적을 물리치기 위함이거늘, 너희들은 프랑스군이 침입하는데도 싸우지 않고 포탄 한 소리에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위로는 나라의 존망을 생각하지 않았고 아래로 장수의 생사를 돌아보지 않았으니 마땅히 군법으로 처형하여 하나로써 백을 징계할 것이로되, 프랑스군을 깨뜨리지 못한 상태에서 자기의 병졸을 죽이는 것은 좋지 못한 일이므로 아직 그 죄를 용서한다. 만일 다시 전쟁터에 나서서 달아나거나 프랑스군에 항복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죽여 목을 매달아 조금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명령을 내린 뒤에 장군은 다시 총탄을 맞은 갑옷을 내어 병사들에게 보이고 또 총열을 당겨 절반을 끊으니 모든 병졸들이 두려워 엎드리고 전의를 불태웠다. 장군은 3백명을 거느리고 그날 밤 산성으로 침입하니 이때 프랑스군은 산성에 불을 지르고 천막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에 장군은 크게 소리를 지르며 병졸을 지휘하여 야영을 습격하게 하고, 장군은 말 위에 올라 두 손에 칼을 들고 이리저리 프랑스군을 무찌르니 칼 빛을 따라 프랑스군의 머리가 쉴 새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ㅡ랑스군은 패하여 남은 병사들을 이끌고 서문으로 달아났다. 관병이 뒤를 따라가며 죽이니 물에 빠져 죽은 군인들이 많고 살아서 돌아간 자는 수십 명에 지나지 않았다.

장군은 '빨리 쳐서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하고 다시 밤을 도와 양헌수의 부대에 이르러 그들과 합류하고 다음 날 새벽에 강화에 몰려가 프랑스 군함을 포격하니 어재연이 구원병이 왔음을 보고 군사를 보태 함대를 함께 공격하였다, 이에 로제 제독은 놀라 어찌할 바를 모르며 진을 빠져나가 달아나고 관병이 크게 이겼다.

 

관군이 이기고 돌아오니 백성들은 음식물을 차려내고  관군을 맞이하고 문무백관은 관병을 반겼다. 대원군도 크게 기뻐하여 태평연을 베풀고 장졸들에게 상을 내린 뒤, 장군의 총맞은 갑옷을 보고 한숨을 쉬며

"옛날 항우와 관우는 천하에 무적이었다고 하였으되 오히려 칼이 목에 들어갔지만, 지금의 한성근 장군은 창과 칼이 침범하지 못하니 이는 하늘이 낸 장군이며 신장이라. 내게 이 같은 장사가 있어 좌우를 돌보니 이제는 걱정이 없다."

하고 장군을 풍덕도호부사 겸 수성장으로 삼았다.

모름지기 나라가 편안하고 위태로운 것은 집정자의 착하고 착하지 않는 데 있다. 5백년을 이어오면서 시국에 어둡고 춘몽에 취한 대원군은 프랑스군을 물리친 다음 더욱 자만심이 늘어 외국과 통상은 물론 외국인만 봐도 죽였다.

 

1866년(병인) 봄에 영국의 메도즈상사가 교역을 위해 미국인 프레스턴의 제너럴셔먼호호를 빌려 선교사 토머스 등 7명이 평양에 몰래 숨어들어오자 대원군은 평양감사 박규수를 시켜 이들을 모두 죽인 일이 있었다.

미국 정부는 이를 분개하여 태평양 함대의 제독 로저스에게 군함 5척과 육전대 6백명으로 조선을 정벌케 하였다. 미군은 피리핀을 거쳐 황해를 건너 강화에 정박하고 여러 진을 포격하니 순무중군 어재연이 미군 전함 여러 척을 크게 부수고 가라앉힌 뒤 정족산성으로 들어가자 미군 몇 명이 뒤로 돌아 상륙하여 산성으로 공격해왔다.

장군은 미군이 모여있던 곳을 공격하여 수백명을 죽이자 미군은 사방으로 달아났고 관군이 뒤를 따라가며 사살하니 이 싸움에서 살아 돌아간 미국인은 1백여명에 지나지 않았다. 장군은 다시 관병을 거느리고 군함을 공격하니 미군은 남은 병사들을 싣고 달아났다. 첩서가 조정에 이르러 대원군이 크게 기뻐하며 다시 장군에게 정족수성장을 삼으니 이번이 장군의 세번째 출전이었다.
 

10월에 장군은 동부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찬관이 되었고 그 뒤 다시 풍덕부사를 맡고 1882년(임오)에는 병조참판 겸 통리기무아문참획관이 되어 일본인 교련관 호리모또 레이조 공병 소위 등 여러 명과 같이 훈련원에서 별기군을 교련하고 다시 똑똑하고 뛰어난 자제 108명을 뽑아 사관으로 가르치고 일봉인 하나부사 요시모또와 자주 교류하니 두 나라의 교제가 비로소 가까와졌다. 그러나 항상 외국을 배척하고 폐위를 꾀하다 대원군과 그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에게 불평을 샀다.

장군이 안으로 정교를 닦고 밖으로 충의로서 임금을 섬기고 어질게 사람을 대하니 높은 관리로부터 사대부와 서인에 이르기까지 장군을 미워하는 사람이 없되 선혜청 당상 민겸호가 홀로 장군을 두려워하고 꺼려서 해칠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때 마침 궁중에 불이 나서 창덕궁 대조전에 불이 번졌다. 민겸호는 이것을 기회로 여겨 장군에게 불을 끄라 하고 무리 군령장을 두려고 하였다. 장군은 조금도 굴하지 않고

"막중한 궁궐에 불이 일어났거늘 대감은 병졸을 풀어 불을 끌 생각을 않고 오히려 불을 끄라 하고 군령장을 두라 하니 이것이 무슨 법률이요?"

민겸호가 잠깐 말을 꾸며 대답하기를

"옛날 관공은 소열제 유비의 아우로되 화용도로 보낼 때 제갈공명이 군령장을 받은 것은 그 책임을 무겁게 함이요, 결코 해치려고 함은 아니오이다. 지금막중한 궁궐에 불이 일어나니 만일 소홀함이 있어 어전까지 불타면 신하의 충성스럽지 못함이 이보다 더함이 없기로 장군꼐 책임을 무겁게 하기 위하여 문서를 두게 함이니 조금도 괴이하게 생각지 말고 빨리 불을 끄리를 바랍니다."

장군이 사양치 않고 흔연히 군령장을 둔 뒤에 삼으로 엮은 줄 수십 발을 한손에 사려쥐고 한달음에 달려 돈화문에 이르니 민겸호가 벌써 사람을 시켜 궐문을 굳게 닫았다. 장군이 한 번 몸을 솟구쳐 돈화문을 뛰어넘어 대조전 지붕 위에 올라 삼으로 엮은 줄을 전각 한 모퉁이에 얽어매어 힘을 다해 한 번 당기니 수십 간 큰 전각이 삽시간에 풀뭉치처럼 허물어져 내렸다. 장군은 크게 소리를 질러 물을 들이라고 하니 이때 별기군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물을 길러 1시간이 못되어 궁중의 불을 완전히 꺼버렸다.

이것을 본 민겸호는 장군의 용력에 기가 질려 해치려던 마음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못하고 장군의 손을 쥐고 위로하며 '만고의 역사로 천하명장이라'고 칭찬하였다.

모름지기 사람은 편안하면 음탕한 마음이 이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 여러 해 좋은  시절을 지내고 나라가 안정되자 궁중에 유흥이 밤새도록 심해져 내탕금이 바닥나게 되었다. 민겸호는 이것을 빙자하여 몇 달치 군료를 병졸에게 지급하지 않았다. 항상 불평불만을 갖고 있던 구식 군대는 크게 격분하여 6월 9일에 각 영문의 군사가 모두 큰 소동을 일으켜 민겸호, 김보현 등 여러 대시을 죽이고 훈련원과 일본 공사관을 습격하였으며 각 대관의 집에 불을 지르니 서울 여러 곳에 불꽃이 하늘에 솟구쳐 화광이 충천하였다. 장군의 가산과 여러 물건들도 모두 군인들이 불태워버렸다. 이떄 장군은 마침 경기 수군에 시찰을 나가 있어서 서울의 변란을 당하지 않았고 대원군이 폭동을 진압하였다.

 

7월에 장군은 통진병마절제사가 되었다가 1884년(갑신) 12월에 다시 승원의 우승지로, 가의대부동지중추부사를 겸임하고 1886년(병술)에 풍덕도호부사를 함꼐 맡았다. 1년후 다시 황주,진관,병산병마절제사 후영장포토사 태백수성장이 되었다가 1887년 1월에 정주병마절제사, 독진장 자헌대부, 정주목사가 되었다.

장군이 평안도 정주에 가서 여러라 달을 지내니 때는 4월이었다. 동헌 정남향에 천년 된 큰 느티나무가 있어 동헌에 너무그늘을 드리워 관속에게 나무를 베라고 하였다. 이 나무는 고려 때부터 조선에 이르러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겼고 또는 부중에 섰으므로 관속들이 수백년 동안 많은 돈을 써 가며  치성을 들여온터라 느티나무를 베지 않았다. '그 가지라도 꺽는 사람은 반드시 나쁜 병애 걸려 죽는다'고 하여 정주 부중의 관속은 말할 것도 없고 서민들도 숭배하는 나무라 하여 나무를 베라는 명을 듣고 육방의 관속과 일반 백성이 모여 동헌에 모여 머리를 두드리며

"옛날 제경공은 느티나무를 사랑하여 수괴령을 내렸고, 북송의 왕진공은 느티나무를 길러 귀한 자손을 두었으니 사람이 느티나무에 대하여 조금도 걱정할 일이 없습니다.  지금 사또께서 오신 지 오래 되지 않아 아무 이유없이 느티나무를 베라고 하시니 저희들은 그 까닭은 알지 못하겠습니다. 또한 이 느티나무는 천여 년 부중에서 자라 여러번 병란을 겪었을 뿐만 아니라 괴신이 느티나무에 머물어 있어 조금만 정성이 부족해도 재해가 일어납니다. 바라건대 사또는 옛날 조조가 배나무를 베고 전염병에 걸렸던 옛이야기를 참조하셔서 참괴령을 다시 거두십시요."

장군이 웃으며 여러 사람에게 말하기를

"사람은 만물의 신령입니다. 감각이 있는 동물도 잡아 음식으로 쓰거늘 하물며 감각이 없는 나무야 말할 것도 없습니다. 오랜 옛날 삼황시대에는 인구가 적고 세상에 덮인 것이 나무라 그 생육이 어찌 천년 정도리오마는 익이 산택을 불태울 때는 크고 작은 것을 헤아리지 않았고, 하우씨가 홍수를 다스릴 때는 산에 따라 나무를 베었으니 지각이 없는 나무가 어찌 사람에게 화복을 주겠습니까? 또한 조조는 관공의 목관을 보고 놀라서 병이 든 것인데 후세에 말을 만든 사람이 '배나무 동티'라 한 것이니 어를 어찌 혼동합니까? 모름지기 책망은 원수에게 있으니 설혹 화가 있더라도 벌은 내가 혼자 받을 것입니다. 어찌 읍중 노인과 부하 관속에게 미치겠습니까? 내가 한 번 령을 내렸으니 어기지 말고 나무를 베어라."

사람들이 두렵고 놀라 감히 도끼를 들지 못하였다. 장군은 다시 말하기를

"너희들이 나무 한 그루 때문에 매월 두 번씩 금전을 헛되이 쓰니 이는 허무한 낭비라. 내가 이곳에 없으면 할 일 없거니와 내가 이것을 눈으로 보고 찬성함은 미신을 길러 민심을 어지럽게 함이니 너히 무리들 중에 감히 하수할 사람이 없으면 내가 먼저 도끼를 시험할 것이다."

하고 뜰에 내려가 싸울 때 쓰던 칼을 빼 나무를 치니 관속들이 더욱 황공하여 나무를 찍기 3일만에 이 큰 느티나무를 동헌 앞으로 쓰러뜨렸다.

이 날 밤에 장군은 잠을 잘 잤다. 부인 김씨가 보니 동헌에 불빛이 가득하고 자정이 지나며 비가 내리더니 건장한 사람이 머리를 풀고 신발을 벗고 동헌에 올라와 가림발을 걷고 들여다 보다가 크게 놀라며 "아이고 무서워라. 신장이 계신다." 하며 달아났다. 부인은 크게 놀라 장군을 흔들어 깨워 그 본 것을 알리니 장군은 "사악한 것이 바른 것을 범하지 못한다."하고 더욱 태연하였다. 그 해가 지나도록 부중에 아무 병도 없고 오히려 농사가 잘 되었으니 사람들이 더욱 장군을 우러러 공경하였다.

 

 

하루는 정주의 유학자들이 장군의 용력을 보고자 부중 남쪽 다리에 사연을 마련하고 장군을 청하여 활쏘는 법을 비평해 주실 것을 원하니 장군이 흔쾌히 허락하고 종일토록 활터에 나가 활쏘는 것을 구경하였다. 저녁에 이르러 여러 사람이 큰 활 하나를 수레에 싣고 들어와 장군에게 공손히 청하기를 "오늘 양쪽의 승부가 잘 가려졌으니 이는 사또께서 지도해 주신 덕입니다. 감사만사이오나 지금 양방이 각기 돌아가는 마당에 여흥이 없으니 사또께서 한 번 활을 시험하셔서 여러 사람들의 갈채가 일게 해주십시요." 하였다. 장군이 활을 보니 강철로 만들었고 소의 힘줄로 겉을 둘렀는데 무게가 천근이고, 과녁은 500보 거리였다. 장군이 활을 잡아 한 번 당겨 살을 놓으니 시위 소리를 따라 고녁의 붉은 가운데에 명중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모두 손뼉을 치며 "한장군 천세"를 외쳤다.

이로부터 평안북도 일대가 장군의 용력을 두려워하여 도적이 없어지고, 밤에 문을 닫지 않으니 변경이 편안하고 사람들이 기뻐하였다. 장군이 정주에 부임한 지 4년이 되었지만 조금도 백성을 범하지 않으니 거리마다 선정비요, 사람마다 덕을 칭송하였다. 

 

1891년 봄에 선혜당상 민영준이 장군에게 많은 돈을 요구하자 장군은 이치를 따져 받아들이지 않았다. 민영준이 이를 미워하여 거짓말로 장군을 고발하니 조정에서는 장군을 강원로 김화를 정배하였다. 장군은 아무 잘못없이 귀양지에서 반년간 고초를 당하다가 1892년 봄에 정배가 풀려 자헌대부 한성판윤이 되었다. 이때 명성황후는 밤이 새도록 궁중에서 흥겹게 놀았다. 조정은 관작은 팔고 사서 광대 같이 비록 신분이 낮고 천한 사람이라도 돈만 많이 바치면 수령방백을 받을 수 있었고, 권세가에도 뇌물이 번성하며 신구양당이 서로 공격하고 권리와 이익을 다투는 당파가 만들어졌다. 장군은 국정이 나날이 어지럽고 세태가 또한 바뀜을 살펴 기회를 타서 벼슬을 그만두고 산명수려한 곳을 가려 살 곳을 정하고 자손을 가르치고 기르려 하더니, 하루는 옛날 서울로 올라올 때 복자가 주던 글귀를 점검하고 "봉계이지(逢癸而止)"라는 글귀를 크게 깨닫고 날을 가려 옛친구들과 귀빈들을 불러 잔치를 베풀고 날이 다하도록 즐기다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물건이 성한 듯 쇠하고 달도 차면 기우는 것이다. 내가 포의로 서울에 올라와 위로는 아경(亞卿)에 이르렀고 공은 청사에 드리워 세 번 싸움에 외국 군대를 물리쳤고 국운을 바로 잡으려 하였더니 지금 궁중에서 흥겹게 노는 것이 날로 심하고 구당과 신당이 서로 권세와 이익만 다투니 이는 나라를 위하여 깊이 통탄할 일입니다. 이제 관직에서 물러나지 않으면 후회가 적지 않을 것입니다. 옛날 장량은 한고조를 도와 천하를 통일하였으되 제나라 3만호를 가리지 않고 류(留)땅에 봉하기를 스스로 원했다가, 마침내 적송자를 따랐으니 그 밝고 몸 잘 지킨 것이 능히 후세에 본보기가 될 것입니다. 오늘 내가 부귀를 탐하여 그칠 바를 헤아리지 않으면 내 죽을 바를 알지 못할 것입니다."하고는 상소를 올려 지방으로 가게 해달라고 청하니 고종황제가 이를 허락하고 벼슬을 더 올리며 인천 땅에 전장 삼백석을 하사하니, 장군은 가솔을 거느리고 강화도 전반면 금월리에 가서 바람과 달을 노래하고 물고기를 잡고 산짐승을 잡으며 노년을 즐겁게 보내게 되었다.

 

하루는 장군이 염질이 걸려 시일이 지나 병세가 점점 깊어져 어떤 약을 써도 낫지 않더니, 장군의 침실에 한 사내가 머리에 평양 갓을 쓰고 몸에 검은 옷을 입고 북쪽 벽을 뚫고 들어와 남쪽 벽으로 빠져나와 단 아래에 엎드리며 문안을 올렸다. 장군은 기이하게 여겨

"너는 누구인데 아무런 다침도 없이 벽을 뚥고 마음대로 드나드느냐?" 하자 사내가 말하기를

"저는 도깨비입니다." 하자 장군이 크게 기뻐하며

"내가 소시 적에 수원에서 너의 재주를 한 번 보고 항상 너를 보고 싶었는데 네가 먼저 먼저 나를 찾아오니 참으로 기우이구나. 그런데 네가 무슨 일로 여길 왔느냐"

"저는 오늘 대감의 병이 위중하다는 말을 듣고 혹 시키실 일이 있을까 하여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내가 병이 나서 아무것도 먹지 못하다가 오늘 아침부터는 갑자기 붕어찜을 먹고 싶으니 너는 붕어를 좀 구해 오겠느냐?"

"어렵지 않으니 붕어를 곧 잡아 오겠습니다." 말을 마치고 도깨비가 밖으로 나갔다.

이와 같이 장군이 도깨비와 말을 주고 받으니, 사람들은 도깨비 말을 듣지 못하고 "장군이 병이 들어 헛소리를 하신다"고 하며 온 집안에 울음소리가 났다. 장군은 울음을 말리며 "이제는 내 병이 나을 것이니 아무 걱정하지 말거라. 조금 있으면 붕어가 올 것이니 진하게 고아 가져와라." 하였다.

때는 6월이라 장마비가 여러 날 내려 "물이 불어 다리가 끊어지고 교통이 끊겼는데 붕어가 어디서 온단 말씀인가?" 하고 사람들은 더웃 허둥대며 한약을 또 다려 올렸다. 그런데 한낮이 안되어 한강에 산다는 신바둑이라는 사람이 붕어 한 짐을 지고 왔다. 집사람들이 크게 놀라 붕어를 가지고 온 연유와 물난리에 어떻게 왔느지 묻자 신바둑이 또한 놀라며 "저는 내수사찬부라 수시로 진어하므로 붕어를 많이 기르고 있는데, 오늘 아침에 한성부 관리가 나와 지금 대감의 환후가 위중하신데 붕어가 아니면 약이 없으니 빨리 한 짐 지고 가자 하여, 물이 넘치는데 어찌 갈 수 있겠는지 물으니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하기로 관리를 따라 이곳까지 왔는데, 과연 오는 길은 다리도 멀쩡하고 큰 개울은 관리가 붕어 짐을 지고, 저까지 개울을 건너게 해주어 아무 고생없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집사람들이 더욱 의아하여

"그럼 같이 온 관리는 어디로 갔느냐?"

"지금 저와 같이 이 댁으로 짐을 지고 들어와서 관리는 바로 수청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면 그 관리를 좀 데리고 오거라."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하고 신바둑은 밖으로 나갔다. 1시간이 지나 신바둑은 다시 들어와

"세상에 이런 괴변을 보겠습니까. 금방 같이 온 사람이 어디 갔는지 찾지 못했습니다."

집사람들이 그제서야 도깨비의 인도인 줄 알고 장군의 헛소리 같던 말을 자세하게 말하니 신바둑은 크게 놀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집사람들이 붕어를 고아 장군한테 올리니 장군은 여러 번 먹고 병세가 호전되고 사오일 지나 완쾌하였다.
 

산과 들에 눈이 쌓이고 강과 하천이 얼어 붙은 추운 겨울 어느 날, 장군이 무료하게 앉아있는데 전 참군 윤홍섭이 북청 보라매 한 마리를 사가지고 와서 장군에게 사냥을 가자고 하였다. 장군은 흔연히 허락하고 몰이꾼 수십명을 거느리고 경기도 안산의 오자봉으로 들어갔다. 원래 오자봉은 산맥이 장원하고 나무가 울창하여 맹수가 때때로 나타나므로 소풀먹이는 아이나 나무하는 사람들, 포수들도 들어가기를 꺼리는 산이었다. 이때 윤홍섭은 장군과 오자봉 상봉에 올라 매를 손에 높게 받치고 산 아래 몰이꾼들에게 꿩을 튀기게 하였으나 이 날은 이상하리 만치 꿩이 한 마리도 날아 오르지 않았다. 이에 윤홍섭이 매를 장군에게 맡기고 분연히 숲으로 들어가 꿩을 튀겼는데 몇 시간이 지나도 도무지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장군이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윤홍섭이 간 길을 따라 한참을 가니 놀랍게도 윤홍섭은 옷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손등이 다 긁혀 가지고 눈 위에 혼자 서 있는 것이었다. 장군은 크게 놀라

"참군은 무슨 일로 꿩도 튀기지 않고 눈 위에 서서 혼자 뭘 보고 있느냐?" 하자, 윤홍섭이 장군을 보고 크게 반기며 헐떡이는 목소리로

"제가 지금 호랑이가 싸우다가 목숨이 위태롭습니다. 살려주십시요."

"호랑이가 어디에 있는가?" 윤홍섭이 한 쪽을 가리키며

"저 바위 밑에 납작 엎드려 저를 노려보는 것이 호랑이입니다."

장군이 살펴보니 과연 한마리의 늙은 호랑이가 바위 아래에 엎드려 있는데, 온 몸의 털이 바늘같이 꼿꼿하게 서 있고 두 눈은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장군은 윤홍섭을 보고

"참군은 빨리 돌아가시요. 내가 혼자 이 짐승을 잡아가지고 가겠소." 하자 윤홍섭은 호랑이에게 얼마나 혼이 났던지 장군의 생사를 생각하지 않고 왔던 길로 혼자 가버렸다. 호랑이는 윤홍섭이 가버리자 어흥하는 소리를 크게 지르더니 벌떡 일어나 이번에는 주홍같은 빨간 잎을 딱 벌리고, 강철 같은 발톱을 번쩍들고 장군에게 달려들며 긴 꼬리로 흰 눈을 감아 장군의 얼굴에 흩뿌리고 두 코로 악취를 뿜어대니 그 기세가 대단히 위맹하였다.

장군은 정신을 가다듬고 호랑이의 허리를 힘껏 껴안자 호랑이는 용을 쓰며 몸을 불끈 솟구었다. 호랑이 털이 미끄러워 호랑이 몸은 쏙 빠져나가고 발목만 손에 걸렸다. 장군이 발목을 잡고 호랑이를 땅 위에 한 번 내동댕이 쳤으나 눈 속에 파묻히기만 할 뿐 죽기는 커녕 일어나 계속 장군에게 달려들었다. 장군은 달려드는 호랑이를 두세 번 연이어 메어쳤다. 칼이 있었으면 어렵지 않게 호랑이를 제압했겠지만 아무 준비없이 보라매를 들고 있던 터라 몸에는 무기가 될 만한 게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다 이번에는 호랑이를 안아 바위 위에 누르며 비벼 보았으나 바위에도 얼음이 얼어 아무 소용이 없었다.

어느 덧 장군과 호랑이가 모두 지쳤다. 장군이 호랑이를 안고 왔던 길 쪽으로 밀어붙이니 호랑이도 뒷걸음쳤다. 잠시 후 몰이꾼들이 이르렀으나 호랑이를 보고는 모두 달아나기에 나빴다. 장군은 잠시 고민하다 왼편 소나무에 밀어붙이며 한 주먹 날리니 호랑이는 허리가 부러져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드러누워 발만 허둥거렸다. 그러자 장군은 호랑이 배를 한 번 걷어차니 발이 호랑이 배를 뚫고 등으로 나가 박혔다. 장군은 비로소 이마의 땀을 씻고 발을 뽑아 내니 신발은 말할 것도 없고 온 몸이 붉게 물들어 마치 붉은 치마를 입은 것 같았다.

장군은 집으로 돌아와 사람과 소를 보내어 호랑이를 싣고 오니, 길이가 8척 5촌이나 되는 큰 호랑이였다. 장군이 탄식하기를

"내가 육십 평생에 사람은 적수가 없었고, 산돼지 같은 짐승을 많이 잡았으나 그렇게 위맹한것은 없었는데, 오늘 이 늙은 호랑이의 용력은 가히 산중의 영웅이요, 온갖 짐승의 왕답다."하였다.

원래 장군의 심복은 윤홍섭, 주일환, 박일영, 아귀, 하룡흥, 염기섭, 장일상 등 7명이니 모두 천 근을 드는 힘이 있었다. 그 중에 이귀는 안성의 여관에서 만났던 도적의 우두머리였다. 지난 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서울로 올라와 장군을 가까이에서 모시며 밤낮으로 떠나지 않으니 장군은 그 뜻을 가상히 여겨 문하에 받아들였다. 7명이 항상 장군을 따라 별기군 교련시에 각기 참부교가 되었고 그 후 군수 혹은 현감이 되고 참군, 별장이 되었다.

장군이 벼슬에서 물러나 있자 종종 찾아와서 장군의 고적함을 위로하였는데 이 날 윤홍섭이 와서 매사냥을 나갔다가 호랑이와 싸우다가 장군의 도움으로 구사일생하게 된 것이었다.

 

세월은 물같이 흘러 장군은 나이 70에 이르렀다. 이때 광주황제가 덕수궁 함녕전에 들어 4품이상의 칠십이 된 사람들을 모두 기로소에 들게 하니, 장군은 정이품 정헌대부 중추원 칙임의 벼슬을 겸하여 기로소 당상이 되었다. 장군은 다시 2년간 경복궁 영추문 밖에 있던 매동에 머물렀는데 넷째 아들 열령이 안면도에 가게 되어 장군은 약을 복용하기 위해 안면도로 내려가 지냈다.

7월 25일은 고종황제의 생일이라 고종황제가 장군을 잔치에 부르니 서울로 향하게 되었다. 때는 마침 여름이 지나고 초가을에 접어들고 있었다. 장마비가 그치고 맑은 바람은 솔솔 불어 여행하기 매우 좋았다. 순풍에 돛을 달고 배가 넓은 바다로 나갔다. 그런데 뱃사공의 순간 부주의로 배가 갑자기 암초에 걸리고 말았다. 배에 탄 사람들은 모두 당황하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장군은 이때 재빨리 바다로 뛰어들어 뱃머리를 당겨 보았지만 배가 쉽게 암초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장군이 다시 온 힘을 다해 다시 당기니 키의 다리가 부러지며 배가 암초에서 빠져나왔다. 배는 동품을 따라 앞으로 둥둥 떠내려갔다. 밤이 되자 바다 위에 안개가 자욱하고 가는 비가 내려 지척도 분간하기 어려웠다, 키 없는 배는 방향없이 흘러갔다. 이때 갑자기 큰 횃불을 든 사람이 안개 속에서 나타났다. 뱃사람들이 "어디 가는 뱁니까?" 하고 물어도 아무 대답도 없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계속 흘러갔다. 팔미도를 지나 인천항에 가까이 들어오니 아침이 밝아왔다. 갑자기 횃불도 없어지고 아무 배도 보이지 않았다.

배에 탔던 모든 사람들이 이를 기이하게 여기며 

"대감은 참 선인이십니다. 바다에 들어가 암초에 걸린 배를 손으로 빼내시고, 키 없는 배가 밤에 목적지까지 잘 도착하였으며, 오는 동안 불빛이 앞을 밝혀 인도하니 이는 다 대감의 큰 복력으로 저희들 목숨까지 살리셨습니다."

하며, 모든 사람들이 다투어 살려준 은혜에 감사하고 칭송하였다.

장군은 배에서 내려 다시 기차로 서울에 들러 매동 별저에 머물다가 진연을 마치고 8월초에 다시 안면도로 들어갔다. 인천에서 탄 배가 팔미도를 지날 쯤 바다에서 은빛 물고기들이 뛰노는 것을 보고 장군이 회고하며 탄식하기를

"내가 옛날 산성에서 홀로 프랑스군과 싸우다 기진맥진하여 바다에 뛰어들어 저런 고기 너댓마리를 날로 먹은 뒤에 정신을 차렸더니 춘풍추우에 벌써 40년이 흘렀구나. 그때 장사들은 모두 죽고 부사졸도 몇 안남았으니 지난 날을 되돌아보면 눈물이 절로 흐른다."하고 처연히 뱃머리에 올라 물고기가 노는 것을 구경하는데 갑자기 참돔 수십 마리가 갑판으로 뛰어들었다. 장군은 크게 기뻐하여

"이것은 하느님이 주신 것이니 오늘 배 위에서 잘 먹게 되었다." 하고 뱃사람에게 회도 치고 국을 끓이게 하여 모든 사람들이 배불리 먹었다.

 

예로부터 싸움에 나간 장군치고 부귀를 누리다 병을 얻고 평생을 마친 사람이 많지 않았다. 중국의 '사기'를 보더라도 회음후 한신은 싸우면 반드시 이겨 한나라 400년을 일으켰으되 여후에게 죽임을 당했고, 촉나라 수정후 관운장은 혼자 적진에 들어가 다섯 관문의 5장을 베어 천하에 적이 없었지만, 긴 수염을 흩날리며 촉나라로 돌아가다 여몽의 꾀에 빠져 명대로 살지 못하고 죽었다. 고려말 최영 장군은 충성을 다하여 기울어지는 나라를 지키려다 제주도에 정배됐다가 한을 머금고 죽임을 당하였고, 조선 선조 때 김덕령은 1천명의 사내도 감당할 엄청난 용맹으로 왜적을 무찌르려다 무고를 입어 억울한 생명을 다하였다. 충무공 이순신은 거북선을 만들어 해전에서 큰 공을 세월으나 유탄을 맞아 전사하였다. 그러나 장군은 당시 천하명장으로 이름을 날리며 세 번 싸워 모두 이기고, 노년에 향곡에 살 때도 귀신이 돕고 하늘이 도우니 진실로 이름난 장수요, 복 있는 장수였다. 장군이 비록 늙어 고기 심근(心筋)과 밥 한 되를 먹고 호랑이를 한 주먹으로 때려잡으며, 큰 강을 배 없이 걸어 건너는 용력으로 어찌 울분이 없었겠는가?

 

하루는 장군이 저녁 식사를 마친 뒤 관아로 나오다가 기둥 위에 박힌 큰 나무못을 주먹으로 한 번 치니 팔뚝 같은 나무못이 기둥 속으로 다 들어갔다. 다시 큰 당으로 들어가 아이 둘을 좌우로 갈라 세우고 뒤뜰에서 한 번 몸을 솟구쳐 관사를 뒤어 바깥 동헌 마당에 내려서니 머리에 썼던 탕건이 바람에 날려 땅에 떨어졌다.

장군은 탄식하기를

"내가 옛날 젊었을 때는 남대문과 동대문을 뛰어 넘어도 옷고름 하나가 움직이지 않았는데 이제 요만한 관사 하나를 뛰어 넘는데 탕건이 땅에 떨어지니 미루어 내 힘이 쇠진한 것임을 알겠다."하고 외당으로 들어오니 당중에는 수십명이 앉아 있었다. 여러 손님들이 장군의 용력을 한 번 보고자 청하니 장군은 흔연히 허락하며 돌을 가져오게 했다. 한 사람이 밖에 나가 동이 만한 차돌을 안고 들어왔다. 장군이 한 손으로 돌을 들고 다른 손으로 그 돌을 내려치니 많은 번갯불이 손에서 일어나며 그 큰 돌이 조각조각 부서지고 돌가루가 방바닥에 두어 되나 수북이 쌓였다.

이것을 보던 손님들이 모두 입을 벌리고 감탄하였다. 장군은 다시 총알 한 줌을 입에 물고 대청으로 향하여 뿜으니 총알이 6간 대청을 날아 건너편 벽에 콱콱 박혔다. 손님들은 장군의 위엄에 놀라 아무 말도 못하였다. 이 소문이 퍼져 이후로 해마다 침입하던 해적이 감히 안면도에는 들어오지 못하였다.
 

1905년 12월 28일, 장군이 늙고 병들어 만면도에서 돌아가시니 이 날 밤에 큰 별이 안면도에 떨어지고 앞산이 5일간 크게 울었다. 장군이 죽었다는 소식이 궐내에 이르니 고종황제가 크게 슬퍼하시며 이제는 나의 다리와 팔이 끊어졌다고 하시고 장사 지낼 경비를 넉넉히 내리고 글 한 수를 보내며 지방관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하니 이것이 장군의 마지막 길이었다.

 

출처 : 괴향문화 제23집 '병인양요 한장군전' 저자/송헌석, 번역/하종필

 

괴산군 칠성면 쌍곡리의 장군 묘. 외쌍곡 뒷산에서 비학산 줄기 밤실고개로 가는 야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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