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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ㅣ자연ㅣ뉴스

이정현, 낡은 자전거 한 대로 지역주의 철옹성 넘다

by 라폴리아 2014. 7. 31.

이정현, 낡은 자전거 한 대로 지역주의 철옹성 넘다

[중앙일보] 2014.7.31일자

 

지역 조직도, 중앙당 지원도 없이 순천-곡성에서 3번째 호남 도전  성공

새벽 3시부터 나홀로 유세

17대 총선 1%에서 이번에는 49% 득표

"내가 잘 나서 아니라 기회 주신 것"

 

7·30 재·보선에서 전남 순천-곡성에 출마한 새누리당 이정현 후보가 한국 정치사에 기록될 대이변을 일으켰다. 박근혜 대통령인 최측근인 이 후보는 30일 개표 결과 득표율 49.4%를 기록해 40.3%에 그친 새정치민주연합 서갑원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새누리당이 전신인 민자당 시절까지 통틀어 호남에서 국회의원 당선자를 배출한 건 1996년 15대 총선(강현욱 전 의원 군산을 당선) 이후 18년 만이다. 이 후보는 고향인 곡성에서의 몰표를 바탕으로 개표 초반부터 앞서 나갔고, 서 후보의 고향인 순천에서도 우위를 나타냈다. 

 

 

 

“떨렸다. 봉급다운 봉급을 받아본 적이 없는 나에겐 그야말로 큰 유혹이었다. 그때 전화기를 잡고는 ‘거절 못 하면 박근혜 전 대표와 영영 헤어져야 한다’며 흔들리지 말자고 기도했다.”

전남 순천-곡성에서 당선된 새누리당 이정현 당선자는 2007년 한나라당 경선에서 박근혜 대통령(당시 후보)의 공보특보로 활동했다. 경선 직후 당시 김문수 경기지사가 그에게 정무부지사 직을 내밀었다. 그는 흔들렸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고 고사했다. 며칠 뒤 박 대통령이 그를 불렀다. “왜 가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는 “자꾸 그러시면 정치 그만 둘라요”라고 해 버렸다. 박 대통령은 웃음 띤 얼굴로 “고맙다. 잊지 않겠다”고 했다. 이를 전해들은 그의 부친은 “잘 혔다. 나는 니가 내가 존경한 박정희 대통령의 딸을 가까이서 모시는 것만으로도 여한이 없다”고 말했다.

이 후보는 그렇게 세상이 모두 아는 ‘박근혜맨’이 되었다. 그와 박 대통령의 인연은 2004년으로 거슬러 간다. 17대 총선 당시 광주에 출마한 그에게 당 대표이던 박 대통령은 두 번이나 전화를 해 격려했다. 선거가 끝나면 밥을 사겠다고도 했다. 약속대로 박 대통령은 총선 뒤 낙선한 후보들을 불러 식사를 대접했다. 여기서 이 후보는 “당이 호남을 포기해선 안 된다”며 격정을 토로했다.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박 대통령은 “어쩜 그리 말을 잘하세요”라고 감탄했다. 며칠 뒤 박 대통령은 그를 당 수석부대변인으로 임명했다. 그는 박 대통령 곁을 10년간 지켰고, 2012년 대선 직후 청와대 정무수석과 홍보수석을 지냈다.

그는 이번 재·보선에서 자신의 꿈인 ‘호남의 새누리당 의원’을 실현하기 위해 세 번째 도전장을 내밀었다. 마침내 그 꿈은 이뤄졌다. 정치권에선 ‘기적’이란 얘기가 나왔다. 새누리당이 전신을 포함해 호남 지역에서 국회의원을 배출한 건 1996년 15대 총선 때 전북 군산을의 신한국당 강현욱 전 의원 이래 18년 만이다. 이 후보의 17대 총선 득표율이 1%였던 것을 떠올리면 혁명적 발전이다. 이날 순천-곡성의 투표율은 51.0%였다. 웬만한 총선 투표율에 육박했다. 이 후보가 지역주의를 넘어 호남에 교두보를 마련할 수 있을지에 대한 관심이 투표율로 이어진 거다. 상대가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측근인 새정치민주연합 서갑원 후보라서 대립각은 더 뚜렷했다.
이 후보는 49.3%를 득표했다. 고향인 곡성에서 몰표가 나왔고 서 후보의 출신지인 순천에서도 앞섰다. 그는 당선이 확정된 후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일단 기회를 한번 주신 걸로 알고 있다”며 “순천 시민과 곡성 군민이 정치를 바꾸는 위대한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 감격스럽다”고 말했다.

이 후보 선거전의 일등공신은 박 대통령도, 중앙당도 아닌 낡은 자전거 한 대였다. 그는 선거 내내 허름한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나홀로 유세’에 나섰다. 시 의원 출마를 포함한 3번의 과거 도전에서 “지역 조직보다는 밑바닥 민심이 가장 중요하다”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후보는 선거 운동 기간 내내 새벽 3시30분에 일어나 택시·버스 기사와 환경미화원의 손을 잡으며 하루를 시작했다. 그러면서 “2년 동안 머슴처럼 쓰고, 쓰레기통에 버려달라”고 호소했다. 그 호소는 먹혀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