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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기타

로망스와 세하 주법

by 라폴리아 2020. 2. 25.

로망스! 멜러디도 단순하고 반주부도 매우 단순하다. 단지 악보만 보고 말한다면 영락없이 초보자용의 곡이다. 단, 그것을 기타로 연주해야 한다면 절대로 초보자용의 곡이라 말할 수 없을 테지만, 정신이 온전한 사람이라면 그 누가 감히 그것을 초보자용 기타곡이라 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듣는 사람의 마음을 그렇게 설레게 할 수가 없다. 듣다 보면 어느새 애틋한 심정이 되어 그 어떤 향수에 젖어들고 만다. 그것은 들을수록 주술적인 힘 같은 것이 느껴지는 그런 곡이다. 그러나, 반드시 클래식기타로 연주될 때에만 그렇다!
 

바람날 수밖에 없었던 퀸카 피아니스트 아가씨의 사연

시골역 한적한 곳에서 남루한 기타 케이스를 깔고 앉은 채 연주에 열중하고 있던 한 중년사내로부터였다, 지윤이의 마음을 온통 뒤흔들어 놓은 문제의 로망스를 듣게 된 것은. 사내는 마치, 총기 케이스를 깔고 앉은 채 날렵하게 쭉 빠진 망원소총을 익숙한 솜씨로 요모조모 만지작거리며 손질하고 있는 킬러 같았다. 아무리 급박한 상황이 닥쳐도 결코 유유자적함을 잃지 않을 프로페셔널 킬러. 그녀가 갑자기 그러한 생각을 하게 된 것은 그 순간에도 멀리 자신의 방에, 언제나 그렇듯이, 덩그러니 놓여 있을 피아노를 떠올린 데 대한 일종의 반사작용 같은 것일런지도 몰랐다.
탱크!, 무한궤도 바퀴조차 달려 있지 않은. 그랬다. 피아노, 그것은 영락없이 앉은뱅이 붙박이 탱크다. 아무리 잘 연주할 수 있으면 뭐하나. 트럭을 동원하여 꾸역꾸역 실어다 주지 않는 한 실전 투입 자체가 불가능한 것을. 시골역에까지 가볍게 끼어차고 와서 흥이 날 때 저렇게 아무곳에서나 연주할 수 있는 기타(guitar). 그 사내가 가진 그러한 자유가 부럽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스페인 민요라 하기도 하고 영화 '금지된 장난'의 주제곡이라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그냥 기타 연습곡이라 하기도 하는 -그러고 보니 쬐끄만 것이 아이디(ID)는 꽤나 여럿이다- 그 로망스를 그때 처음 들어본 것은 아니었지만, 그 단순한 곡이 그토록 사람의 마음을 뒤숭숭하게 휘저어 놓을 수 있음은 예전에 미처 몰랐었다. 이름모를 선승(禪僧)이 던져 놓은 화두(話頭)가 갑자기 풀린 듯, 그 순간 지윤은 기타 소리에 감전되어버린 것이었다.
기타를 연주하던 그 사내는 우습게도 낯익은 사람이었다. 그는 키가 작은 편이었으며 체구도 왜소했는데, 지윤이네 집 근처에 있는 기타학원에 드나드는 것을 가끔씩 본 적이 있다. 그런데, 오랫만에 바람도 쏘일겸 완행열차를 타고 동해안으로 간 것이 그 사내를 그곳에서 보게 된 단초가 된 것이다. 우연? 하지만, 이 정도의 일은 드물지 않게 일어나는 일상사일 뿐이다, 「손바닥만한(?) 나라」라고 푸념하는 사람도 있지 않은가. 그 사내도 바람 쐬러 왔을까?
아님, 다른 볼 일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바람난 유부녀라도 꼬셔 볼려는 음흉한 속셈을 감추고 있었을지도. 하지만, 사내의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어보이는 생김생김을 보고 지윤은 피식 웃고 말았다.
평소 절대로 서로 아는 척하기 없기로 작정하고 지내던 이웃일지라도 여행중 낯선 곳에서 갑자기 맞닥뜨리면 엉급결에 서로 아는 체하며 인사해 버리기 십상이다. 행여, 그런 불상사가 벌어질 것이 싫어서 멀찌감치 떨어져서 짐짓 딴 곳을 보는 척하며 들었지만 기타소리는 어느새 지윤이의 가슴속에 도발적인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직접 연주해 보지 않고는 결딜 수 없게 만드는 선동적이고도 도전적인 소리. 「나이도 지긋한 사람이 이제 고작 로망스 따위를 연주하고 있다니!」하고 한 편으로는 내심 조소를 보내며 무시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시골역의 맑고 서늘한 공기는 기타의 공명통으로부터 밀려나오는 농도 짙은 파문의 가닥가닥을 가감없이 그대로 잘 실어 나르고 있었다. 기타 소리에는 듣는 이를 전율케 하는 어떤 힘이 실려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자 숨돌릴 틈도 없이 악보를 뒤적여 로망스를 찾아내고서는, 그리고 한 구석에 놓여 있던 기타의 먼지를 대충 털어낸 다음 한소절 한소절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몇 소절 지나지 않아서부터 등장하기 시작하는 두통거리. 왼손집게손가락으로 여러 선을 동시에 눌러대야 하는 세하(바레)주법 때문에 골경련이 나기 시작했다. 기타를 산 지 수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별 진척없이 실력이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음은 순전히 바로 그 때문이었다. 적어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모처럼 기타연습을 해보자고 덤빌 때마다 별 저항도 못해 보고 주저 앉게 했던 바로 그 원흉. 「으~이 웬수!」, 손가락에 퍼렇게 기타선자국이 멍들듯 패이도록 눌러대도 틱틱거리는 파열음만 나올 뿐. 도대체 기타를 연주하는 사람들은 이 고통을 어떻게 참고 연주하는 것일까. 언제부턴가 그것은 그녀에게 있어서 하나의 수수께끼가 되었다. 그때였다. 순간 뇌리를 스치는 신통방통한 생각. 그렇다. 피아노로 편곡된 악보가 있지 않은가. 역시 피아노는 악기중의 제왕인 것이다.
세상에 피아노용으로 편곡되지 않은 악보가 있던가! 편곡된 로망스 악보를 구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자, 그녀는 희색이 만연하여 피아노로 와락 달려들었다.

그런데, 아무리 되풀이하여 연주해 보아도 시골역에서 들었던 그 음악이 아니었다. 어쩜 이렇게 다를 수가! 실망, 실망. 지윤이의 피아노 실력은 이미 자타가 공인하는 것이었지만, 정작 피아노가 뱉어내는 소리는 맹숭한 분위기를 끝내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건 로망스가 아니다, 로망스가 아냐」. 하지만, 아무리 기를 써도 기타 소리에 실려 있던 그 애틋함을 재현해낼 수 없었다. 치미는 짜증. 왕짜증이다. 마침내 지윤은 건반을 쾅! 내리치고는 연주를 중단하고 말았다.

심통을 이기지 못해, 기타 악보와 피아노 악보를 세심하게 서로 비교해 보았다. 하지만, 뭐가 잘못된 것인지. 화음이나 베이스음은 당연히 피아노 쪽이 더 풍부한 음향으로 되어 있었다. 멜러디는 완전히 동일하고... 하지만, 실망스러운 것은 그 연주 결과였다. 자신의 피아노 연주는 아무리 애를 써도, 약 오르게도, 시골역에서 중년사내가 연주한 바로 그 로망스의 애틋한 정취와는 거리가 있었다. 피아노라면 초견으로도 곧바로 연주할 수 있는 단순한 내용의 악보. 이 곡에 무슨 말못할 사연이나 비밀이 담겨 있기라도 하단 말인가.

거금(?)을 축내어 로망스가 들어 있는 두 개의 CD를 구입했다. 물론, 그중 하나는 클래식 기타리스트가 연주한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피아니스트가 연주한 것. 그 둘을 비교하여 들어 본 후에야 지윤은 어렴풋이 짚히는 데가 있었다. 연주능력의 차이와는 성격을 달리하는 또다른 이유. 그것은 바로 기타와 피아노라는 두 악기의 고유한 소리가 가진 모종의 성격차 같은 것이었다. 피아노 소리는 매끄러운 편이다. 기타에는 그러한 매끄러움은 없다. 하지만, 소박하면서도 감칠맛 나는 울림이 있다. 때로는 허스키하기도 하고 때로는 티없이 맑은. 게다가 은근히 비브라토까지 더해지면 그것은 그대로 살아 숨쉬는 가수를 방불케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타선이 손가락으로 퉁겨질 때의 그 팽팽한 장력을 느낄 수 있게 하는 소리의 질감. 활시위가「텅!」소리를 내며 허공에 부딪히듯, 그와 같은 내밀한 힘이 더해진 소리. 그것이 밀려와서 톡톡 고막을 두들기는 것이다. 마치, 야심한 밤에 울리는 오래된 산사의 은은한 종소리처럼. 「완전히 항복이다.」
지윤은 마침내 결코 피아노로 연주하여 해결될 문제가 아님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죽든 살든 기타와 싸워서 결판을 내어야 할 일임이 분명했다. 「마음 먹으면, 기타라 해서 맞장 못뜰 이유가 없지」 산전수전 다 겪어가며 모진 연습을 견디어 내고 오늘의 피아니스트 전지윤이 된 것 아닌가. 세하(바레)주법에 대한 두려움이 못내 마음에 걸리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악보1

개발새발 음자리를 찾아가며 연주하는 것이긴 했어도, 첫 몇 소절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렇다. 6소절까지는 시원스럽게 잘도 넘어갔다. 그리고 제 7~10마디는 상당히 까다로웠지만 그래도 오기로 견디어낼 수 있었다. 그리하고 나면 e단조의 첫번째 도막은 그럭저럭 넘어가게 된다. 그러나 E장조로 된 부분(두번째 도막) 중, 21마디 이후(악보1, 2)는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다. 황당.


악보2

왼손 1번손가락으로 계속 바레(세하)를 해야 하는 소절들이 연거푸 등장하는데, 그야말로 손가락이 끊어져 나가는 고통만 있을 뿐 소리조차 제대로 나지 않았다. 한술 더 떠서 27마디(악보3)의 왼손운지는 손가락을 아무리 벌려도 음을 짚는 것 자체가 아예 불가능. 「지판의 음자리조차 제대로 짚을 수 없으니, 도대체 어쩌란 말인감?」.
 

악보3

대개의 피아니스트가 그러하듯이 지윤의 팔, 그중에서도 특히 손가락 동작에 관여하는 근육들이 뭉쳐 있는 하박(下膊) 부위는 눈에 띌 만큼 튼튼했다. 하지만, 어찌된 셈인지 그러한 조건이 별 도움이 되지 않는 듯. 며칠 간 씨름해 보았지만 도무지 진척이 없었다. 27마디는 눈 딱 감고 넘어 간다 치자. 그래 봤자 소용이 없는 것이, 29마디(악보4)에 도달하면 아무리 힘을 주어도 세하로 짚은 ③번선 '라'는 아예 소리조차 나지 않고, 손가락은 고통의 경지를 넘어 마비상태가 되어 버리는 것을. 그것은 쉽사리 넘을 수 없는 완고한 벽이었다. 하지만, 「전지윤의 사전에 패배란 있을 수 없다」.
 

악보4

 

퀸카, 소박 맞다

어렵사리 결심하고 찾아 간 지윤에게 중년 사내는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왕초보인 주제에 제 입맛에 맞는 것만 골라서 배우겠다니··· 「로망스에 나오는 세하주법만 배울 수 없겠느냐」고, 스스로도 괜한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을 것임을 뻔히 알면서 지윤이 제의했던 것이다.
중년 사내는 그녀를 한번 흘낏 쳐다보고는 더 이상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고얀 것! 여기가 뷔페 식당인줄 아나?」, 아마 그는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누군가가 그녀에게 피아노를 그런 식으로 가르쳐 달라고 했다면 그녀 역시 그랬을 것이었다. 그렇다 해서 초보자로 등록하여 처음부터 차근차근 배워 나갈 시간적 여유도 없었고 그럴 마음도 없었다. 그렇다 해서 달리 중년사내를 설득할 묘안도 떠오르지 않았다. 지윤은 무척 자존심이 상한 채, 어쩔 수 없이 학원 문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니, 방 한 구석에 숨죽이고 놓여 있는 기타가 애물단지로 여겨졌다.
 


 안되면 되게 하자!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오전, 지윤은 다시 그 학원을 찾았다. 이른 시간을 택한 것은 학원생이 거의 없는 시간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중년사내는 가볍게 목례를 보냈을 뿐, 그녀의 등장을 완전히 무시하고 연습에만 열중했다. 지윤은 구석 자리에 놓인 의자에 앉아 잠시 사내의 연주를 듣기로 했다. 사내는 바흐(J.S. Bach)를 연주하고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의 왼손은 거의 세하주법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정은 매우 편안해 보였으며 왼손 역시 이완된 자세가 흐트러지는 법이 없었다. 「아!」 지윤은 내심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저런 무지막지한 운지를 저렇게도 쉽게 그리고 부드럽게 계속할 수 있다니···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다소 촌스럽게 생기긴 했지만 그 사내는 세하주법에 관한 한 대가임이 분명했다. 「매달리자」, 지윤은 마음을 다잡았다.
그는 계속해서 바흐(J.S. Bach)의 음악을 몇 곡 더 연주했다. 아마 바흐의 음악을 선호하나 보았다. 덕분에 그녀는 실내를 찬찬히 둘러볼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지난번에는 경황이 없었던 터라 피아노와 그리고 스탠드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몇 대의 기타를 본 것이 기억의 전부였었다. 다시 살펴보니, 한쪽 구석에는 큼직한 책상이 놓여 있고, 책상 곁에는 퍼스널 컴퓨터가 놓여 있었다. 컴퓨터 케이스에 자랑스럽게 적혀 있는 '386'이라는 표시.(주:이 이야기의 시대적 배경은 1990년대 초입니다.) 책상 가까이 피아노가 놓여 있고, 피아노 뒤로는 큼직한 책장들이 배경을 이루고 있었다. 그중 한 책장 옆면에 붙어 있는 빛바랜 기타 독주회 포스터는 아마 중년사내의 젊은 시절의 것일 게다. 그리 많다고는 할 수 없는 양이었지만 악보들이 꽂혀 있었는데, 어쩐 일인지 기타 악보보다는 피아노나 바이얼린 악보 등이 더 많아 보이는 것이 눈길을 끌었다. 책장의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음악서적이 아니라 컴퓨터 관련 서적이라는 점은 다소 격에 맞지 않는 느낌이었다. 그밖에도 여러가지 잡다한 책들이 꽂혀 있었다. 주간지 같은 것도. 그런데, 정말 기이한 것은 책장 아래쪽에 꽂혀 있는 해부학 관련 서적들. 한두 권이라면 그냥 그러려니 했을 터이나 무려 4, 50여권쯤 되었다. 그것도 손때가 묻은 흔적들이 역력한. 원서와 번역서 등이 뒤섞여 있었는데, 책명을 옮겨 본다면 대충 다음과 같을 것이었다.

 인체해부학, 생체역학, 운동생리학, 기능해부학, 골절정복, 운동치료학, 뇌신경학, 계통해부학 등등. 보통 사람의 서가에서 찾아 볼 수 있는 흔한 책은 아니었다. 「그는 실패한 의과대학생이었을까?」아무튼 이 정도의 단서들만으로도 사내는 그녀의 연구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사내는 바흐의 샤콘느(BWV 1004)를 마지막으로 잠시 연주를 멈추었다. 무반주 바이얼린 파르티타 2번 중의 마지막 곡. 「저 엄청난 곡을 여기서 듣게 되다니」. 왜 기타를 '작은 오케스트라'라고들 하는지 실감이 났다. 중년 사내의 연주에는, 아마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을 다양한 악기들의 실체가 악구에 따라 화려하게 명멸했다.
네온사인의 눈부심이랄까. 그녀는 전신에 전율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피가 끓는 듯한 전의(戰意), 연주가로서의 본능적 반사작용에 의해 지윤은 불길에 휩싸이고 있었다. 호적수를 만난 탓이었다.
사내가 연주를 멈춘 틈을 놓질세라, 한 쪽에 놓여 있는 피아노를 가르키며 그녀가 끼어들었다.
『저··· 선생님의 연주 잘 들었습니다. 정말 좋군요. 그런데, 공짜로 선생님의 연주를 감상한 답례로 제가 저기 있는 저 피
아노를 잠깐 연주해 보면 안될까요?』
「히,히! '답례'라니, 잘도 둘러댄다. 음흉한 속셈을 갖고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고 있었으면서···」지윤은 다소 겸연쩍은 기분으로 사내의 표정을 살폈다. 사내는 잠시 의아해 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빙긋이 웃으며 곧 원래의 여유를 되찾았다.
『그러시죠.』

사내의 입에서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녀는 날렵하게 피아노를 향해 움직였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착달라 붙는 베이지색 스판 레깅스바지의 매끄러운 질감 위로 그녀의 싱그러운 젊음이 아름다운 동선(動線)을 그려내고 있었다. 쇼팽으로부터 시작했다. 그녀가 특히 좋아하는 음악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서먹서먹한 분위기를 바꾸기에 적합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쇼팽의 폴로네이즈 Ab장조(Polonaise As-Dur Op.53). 낭낭한 피아노 소리가 실내를 가득 메워 나갔다.
지윤은 이어서 쇼팽의 발라드 f단조(Op.33)를 연주했다. 사내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열심히 듣고 있었다. 지윤은 마지막으로 베토벤의 소나타 한 곡을 연주할까 하다가 도발적인 장난끼가 발동하여 사내가 마지막으로 연주했던 바흐의 샤콘느를 연주하기로 맘먹었다. 이 곡은 원래 바이얼린을 위해 작곡된 곡이지만, 여러 악기로 편곡되어 연주된다. 곡의 시작부터 끝까지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곡. 연주를 끝내자 지윤은 다소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으며 손수건을 꺼내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내었다.
『브라보!』 사내가 손뼉을 치며 외쳤다. 그는 나이를 잊고 어린아이 같이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으며 마냥 행복해 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제 이야기가 무척 잘 통했다. 계략이 드디어 성공을 거둔 것이었다. 지윤은 「기타를 처음부터 차근차근 배울 여건이 되지 않으며 그럴 마음도 없다. 단지 로망스 한 곡만 제대로 연주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우선 당장에 세하(바레)주법의 운지가 되지 않으며 코드(화음)를 제대로 짚을 수 없는 곳도 있으니 이를 해결해 달라.」는 요지의 생각을 조리있게 설명할 수 있었으며, 사내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진지하게 들어주었다. 「하지만, 연주자세조차도 되어 있지 않으니 당장에 세하주법만을 가르치는 것은 거의 무모한 일이다. 제발 2, 3개월 정도만이라도 기초를 배우고 나면 그 후에 지체하지 않고 세하주법의 비결을 가르쳐 주겠다」고 그가 응수했다.
지윤은 그러한 사내의 말에 충분히 일리가 있음을 이해할 수 있었고 더 이상 무리한 주문을 할 정황도 아닌 터인지라 흔쾌히 그 말에 따르겠노라 대답했다. 지윤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래도 끝내 확신이 서지않는 한 가지 의문을 확인해 보기로 했다. 악보를 내밀며 그녀가 말했다.
『이곳을 좀 봐 주세요. 스물일곱번째 마딘(악보5)가요? 암튼 이 부분은 손가락을 아무리 벌려도 음을 짚는 것 자체가 아예 불가능하거든요. 선생님께서 도와주신다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 같아서요. 손 자체가 작으니··· 피아노를 연주할 때에도 늘 그땜에 고생이죠.』

악보5

그가 기타를 건네주며 지윤에게 직접 짚어 보일 것을 요구했다. 그녀의 새끼손가락이 가까스로 8,9번 포지션 간의 경계지점인 제8번 프렛 위에서 파르르 떨고 있는 것을 보며, 중년사내가 자신의 손을 불쑥 내밀어 보였는데 놀랍게도 그의 손은 지윤의 손보다 더 작아 보이는 것이 아닌가! 쉽사리 믿어지지 않는 사실이었다. 해서, 직접 손을 맞대어 비교해 보니 투박하고 억센 손이긴 했지만, 분명 손가락 길이는 지윤의 것보다 짧았다.
그가 그 부분을 직접 연주해 보였는데, 새끼손가락은 여유있게 제9번 프렛에까지 닿고 있었다. 기왕에 내친 걸음. 무례를 무릅쓰고 다시, 손뼘을 재듯이 하여 손을 맞대어 보았으나 그의 손보다는 지윤의 손이 좀더 넓게 벌어졌다. 「어쩜 이럴 수가」 쉽사리 납득할 수 없는 기이한 일이었다. 그가 마술을 부리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가 다짐하듯 말했다.
『이 부분의 운지는 지금 당장에라도 충분히 짚을 수 있어요. 요령만 안다면요. 일종의 트릭 같은 것이지요. 원리를 알고 나면 피식 웃고 말 눈속임 같은 것일 뿐입니다. 아마 지윤씨의 손이라면 4번손가락으로 9프렛 넘어서까지 짚을 수 있게 해 드릴 수 있어요. 하지만, 아직은··· 때가 되면 가르쳐 드리도록 하지요.』
잠시 뜸을 들였다가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손이 작기로야 제 손보다 작은 사람은 드뭅니다. 손이 큰 사람이라면 굳이 특별한 기술을 사용하지 않고도 짚을 수 있는 화음이지만, 손이 작은 사람에게는 별도의 기술이 필요해요. 그러한 테크닉을 구사하지 않는다면 이 부분은 고통스럽기 짝이 없는 패시지가 되겠지요. 화음이나 세하주법을 힘들여 짚어야 한다면 그러한 연주자로부터 정상적인 연주를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왼손운지에 온통 신경을 쓰게 되어 오른손 탄현에 음악적인 표정을 실을 여유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오른손 탄현인데 말입니다. 기타연주에 있어서, 특별히 예외적인 경우가 아닌한, 왼손운지 역시 오른손 탄현동작과 마찬가지로 편안하고 이완된 상태로 행하여져야 합니다. 만일 그러한 이완된 상태를 유지할 수 없다면 왼손운지법에 대하여 진지하게 연구하고 연습하여 그 해결책을 강구해야 해요. 왜냐하면, 그것은 해당 패시지의 왼손운지가 특별히 어렵기 때문이 아니라 대개는 그것을 운지하기 위해 필요한 지식(know-how)이나 테크닉이 아직 연주자에게 갖추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이야기해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타연주자는 선을 직접 뚱겨서 음을 만들어내는 오른손 탄현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왼손운지가 그러한 집중에 방해가 되어서는 안되지요. 왼손운지는 항상 편안하고 여유가 넘쳐야 합니다. 그래서 왼손은 오른손가락이 뚱겨내는 미묘한 뉴앙스의 음에다 비브라토 등의 표정을 더해 주는 동업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죠.』
굳이 그의 진중한 어투가 아니라 하더라도, 중년사내의 연주로부터 이미 상당한 신뢰감을 느끼고 있는 터였다. 지윤은 그의 말에서 예사롭지 않은 전문가적 식견의 깊이를 느끼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말하자면, 세하주법 역시 짚을 수 있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편안하고 이완된 상태로 짚을 수 있느냐가 관건인 것입니다. 다른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이 기타로 연주하는 로망스를 들으면 분명 초보적인 수준의 학습자도 얼마든지 연주할 수 있는 곡쯤으로 생각할 겝니다. 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아요. 음악적 내용이야 초급수준에 해당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지만, 중급 수준의 난이도에 해당하는 왼손운지가 요구되기 때문이지요. 다시 말해서, 음악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 기교상의 문제로 인해 결코 초급 수준의 곡일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로망스의 왼손운지를 편안하고 유연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왼손운지에 관한 한, 웬만한 중급수준의 곡은 무난하게 운지할 수 있다고 할 수 있어요.』
 중년사내는 느릿느릿 말하고 있었지만 간간이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의 줄기를 더듬어 나가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으로 보아 자신의 말에 열중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러한 사고의 흐름을 깨뜨리지 않기 위한 배려로 인터벌이 생길 때마다「그렇군요」하고 지윤은 적당히 맞장구쳤다.

『초급수준을 벗어나서 중급 이상의 수준으로 도약하려 할 때, 부딪히게 되는 벽 중의 하나가 바로 세하(바레)주법입니다. 초보자에게 있어서 세하주법이란 일종의 지옥처럼 여겨질 수 있지만, 그것을 충분히 익혀서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게 되면 오히려 전가(傳家)의 보도(寶刀)나 마이티 카드(mighty card)이기라도 한 것처럼 무소불위(無所不爲)로 휘두를 수 있는 도구가 되어 줍니다. 세하주법이란 그야말로 기타 운지법에 있어서의 꽃이라 할 수 있어요. 기타음악의 광대무변한 세계가 그때부터 비로소 열리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생각해 보세요. 세하주법에 능숙하지 못하다면 항상 제1포지션에서 벗어날 수가 없을 것이니 그 갑갑함이 오죽하겠습니까. 아름다운 연주곡 중에서 제1포지션에서만 연주할 수 있는 곡이란 거의 찾아 볼 수 없거든요.』
 중년사내 혼자서만 계속 이야기하게 두는 것이 미안하기도 해서 지윤이가 말을 거들었다.
『세하주법을 충분히 익히고 나면 보통 운지처럼 그렇게 편안한가요? 선생님의 말씀은 그렇다는 것으로 이해가 되긴 하지만, 실감이 나지 않아서요.』
그가 연속되는 세하를 얼마나 편안하게 운지하는 지 이미 익히 관찰한 바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렇게 편안하게 운지할 수 있다는 사실이 잘 믿기지 않았던 것이다.

 
『통상적인 운지보다 오히려 세하주법이 더 편하게 느껴지거나 또는 약간 더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겠으나 대체로 통상적인 운지와 별다른 차이를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물론, 예외적인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고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왼손운지와 관련된 어려움이 있는 악구에서 그러한 어려움이 세하주법을 응용함으로써 쉽게 해결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세하주법이 아닌 통상적인 운지로 연주할 수도 있는 악구에서 말입니다. 바로, 세하주법이 마이티 카드(mighty card)가 되어 주는 예라 하겠습니다. 학습자가 세하주법을 극복한 후, 이러한 경험을 하게 되면 마치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를 획득하기라도 한 것처럼 자신감에 넘치게 되지요.』
「자유····」지윤은 어렴풋이 그 기분을 이해할 것도 같았다. 『선생님이 바흐를 연주하실 때 보니 세하주법을 연속적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더군요.』

『맞아요. 바흐의 음악과 같이 폴리포니(Polyphony ; 多聲) 양식으로 되어 있는 곡은 세하주법을 사용하지 않고 연주할 수 있는 경우가 드물지요. 또는 세하주법을 사용하지 않고 연주할 수 있는 패시지조차도 세하주법을 사용함으로써 더욱 용이하게 연주할 수 있는 경우가 많기도 하고요. 』
『편안하게 세하주법을 구사할 수 있게 되려면 얼마나 걸릴까요?』 아까부터 묻고 싶었던 질문이었다.
『기존의 교수법이라면 아무래도 4, 5년 이상은 걸리겠지요. 그리고 교수법이 좋지 못한 경우, 10년 이상의 수업과 노력을 통해서도 여전히 세하주법이 정교하지 못한, 불행한 예도 드물지 않습니다.』

중년사내는 약간 장난끼 섞인 미소를 지었는데, 순간 지윤은 사내의 얼굴이 아득하게 멀어지는 듯해서 잠시 어지러웠다.
중년사내가 지윤을 달래는 듯한 투로 다시 말했다.
『하지만, 나는 불과 수개월 내에 충분히 그 비결을 가르칠 수 있어요. 어느정도 기초가 되어 있는 학습자라면 말입니다. 그리고 학습자가 그 비결을 배운 후, 다시 수개월 더 충실히 연습한다면 세하주법의 멍에로부터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테크닉이 더욱 원숙해지기 위해서는 좀더 세월이 필요하겠지만요.』
『······· 』
『과학적인 이론에 의해 습득한 기술과 단지 경험에 의해 습득한 기술, 이 두 가지 경우에 있어서의 차이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중년사내의 엉뚱한 질문. 지윤은 그것이 굳이 대답을 요구하는 질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무언가 설명하기 위해 말머리를 꺼내고 있는 것일 거였다. 지윤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임으로써 다음 말에 대한 호기심을 표시했다.

『과학적인 이론이란 항상 그 재현이 가능합니다. 누가 시행하더라도 이론에 그대로 따르기만 하면 그 결과가 보장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경험적인 이론이란 사람에 따라 그 표현 방법이 천차만별일 수 있으며 그 시행 결과 역시 다양할 수밖에 없어요. 가끔 동일한 결과에 도달하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개는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친 다음에야 가까스로 선험자(先驗者)의 그것에 근접하게 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이를테면 장인들의 기술전수 과정이 그렇지요.』
그가 잠시 말을 멈추었지만, 지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고개를 끄덕여 주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가만히 기다리면 그의 말이 이어질 것이었다.
『기존의 교수법에서, 다른 연주법도 대개는 그렇지만, 세하주법 역시 그 생체역학적인 메커니즘에 대한 근본 원리를 모르는 채 선험자의 막연한 느낌에만 의존하여 교수와 학습이 이루어져 왔습니다. 그러므로 대체로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하게 되고, 오랜 세월이 흘러도 좀체 원하는 테크닉을 획득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게 마련이지요. 흔히 말하듯 '감(感)'을 잡을 때까지 노력하며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담, 선생님께서는 세하주법에 대한 과학적인 이론을 정립하고 계시다는 말씀으로 들리는군요. 』

『맞아요. 나는 해부학적인 원리에 기초한 노하우(know-how)를 가지고 있습니다. 세하주법에 있어서의 해부학적 또는 생체역학적 메커니즘을 잘 이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떤 부위를 어떻게 강화시켜야 그러한 생체역학적 메커니즘에 가장 효율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위해 어떤 방법으로 훈련을 해야 가장 경제적으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지 등에 대한 명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지요. 세하주법에 어려움을 겪는 초보 학습자와 세하주법을 능숙하게 구사하는 프로 기타리스트와의 사이에 존재하는 해부학적인 차이를 잘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은 노하우(know-how)를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도 있고 레슨을 통해 세하주법에 아직 미숙한 학습자에게 적용시켜 단기간에 능숙해지도록 하는 훈련 과정을 언제든지 그대로 재현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재현성(再現性)'입니다. 과학적인 이론이라면 항상 재현이 가능해야 하는 것이니까요. 막연히 '감(感)'에 의존하는 것으로는 바로 이 '재현(再現)'이 불확실할 수밖에 없어요.』

지윤은 감전(感電)된 듯한 충격을 받았다. 중년사내, 그는 지금 연주법(테크닉)과 해부학을 결부시킨 사례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었다. 무서운 이야기였다. 피아니스트로서의 그녀의 날카로운 안목이 그 점을 놓칠 리 없었다. 그것은 테크닉을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궁극의 목표 같은 것이기 때문이었다.
『놀랍군요. 선생님께서는 혹시 의학을 전공하셨나요?』
『그렇진 않습니다. 애오라지 기타 테크닉을 연구하기 위해서 해부학에 관해서만 조금 공부했을 뿐입니다. 그러고 보니 해부학을 공부하기 시작한 지도 어느덧 20년이 되어 가는군요.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 했으니···』

 
『그러한 공부를 시작하시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있으셨겠죠?』
지윤의 까아만 눈동자가 더욱 초롱초롱해졌고, 우유빛 뺨이 발그스레하게 홍조를 띠었다. 갸름한 그녀의 얼굴이 더욱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아마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는 탓일 것이었다. 때문에 중년사내는 스치듯 현깃증을 느꼈다.
『해부학이 나에게는 유일한 해결책이었지요.』 중년사내는 잠시 뜸을 들이며 허공을 응시하다가 마치 독백을 하듯 말을 계속했다.

『어린시절부터 그랬지만, 당시 나에게는 기타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내가 살고 있는 곳에 선생님이 되어 주실만한 분이 계시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설사 그러한 분이 계셨다 해도 너무 가난했기 때문에 수업료를 낼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니 결과는 마찬가지였겠지요. 한데, 기존 기타 연주법에는 납득할 수 없는 점들이 너무 많았어요. 하지만, 사정이 그러하니 테크닉에 대한 의문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내가 매달릴 수 있는 곳이란 오로지 해부학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악기를 연주하는 주체가 사람이니 해부생리학적인 원리에 기초하고 있지 않은 테크닉이란 생각할 수조차 없는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했었기 때문입니다. 연주행위를 하는 진정한 주체는 우리의 정신인 것이며 육체와 악기는 그 수단이며 도구라는 관점에서 볼 때, 정신과 육체 그리고 악기~이 세가지에 음악을 합한 것이 모든 테크닉의 근본 이유가 되어야 하는 것일 테니까요.』

이제 연구과제 중의 하나는 자연스레 풀린 셈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궁금증의 해소는 더욱 많은 궁금증을 낳았다. 말하자면 지윤에게 있어서 그는 여전히 「연구대상」이었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 간 새

 
그리하여 주 3회씩 기타학원에 드나들게 되었는데, 그것은 색다른 경험이었다. 초보자가 되어 무엇을 배운다는 것이 이렇게 즐거운 일인지 그동안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것이다. 하긴, 어린 시절 피아노 배우러 다닌 것은 다소 극성스런 엄마의 성화 때문이었으니. 말만한 규수 신분으로 「작은 별」「주먹 쥐고」등을 연습하는 것이 어째 기분이 좀 이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아무튼 연습에 열중하고 있는 동안은 그런대로 어린시절로 되돌아간 듯해서 신선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하나, 어쩐지 뒷머리에 중년사내의 눈길이 와닿는 듯한 느낌이 들 때는 얼굴이 화끈거리는 기분을 어쩔 수 없었으며 그래서 다소 뻔뻔스러워져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아 먹었다.

한 번은 동심을 만끽하며 「나비」를 열심히 뚱기고 있는데, 누군가『잘 하시는데요! 』하고 말을 건네는 것이 아닌가. 순간 등에 식은땀 한 줄기가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뒤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은주라는 학생이었다. 대학 2학년, 휴학 중이라 했다. 그런데, 딴에는 늙은 후배(?)를 격려하느라 악의없이 던진 것이 분명한 그 말이... 자꾸 빈정대는 것으로만 들리는 비틀린 심뽀를 달래서 칭찬일 뿐이라고 바로잡아 받아들이는 데는 꽤나 이성적인 분석작업을 필요로 했다. 「으이그, 이 자격지심. 나이살이나 먹은 피아니스트가 이게 뭐하는 짓이란 말인감!. 으~히,히,히.」 자조 섞인 웃음이 절로 났다. 일부러 학원생이 뜸한 오전 시간만을 택하여 드나들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 세상사, 우려하던 일일수록 피해가는 법이 없다.

은주라는 학생은 보통 키 그리고 약간 갸냘픈 체구에 붙임성 있고 어딘가 순진해 보이는, 눈의 흰자위와 검은 동자의 경계선이 분명해서 눈빛이 아름다워 보이는 아이였다. 그녀는 목하 브로우어(Leo Brouwer, 1939~ 쿠바)의 Etude를 연습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보고 음악적인 내용에 대해 약간의 조언을 해 주었다. 순전히 구겨진 자존심을 다소라도 회복시킬 속셈으로. 은주는 전혀 불쾌해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눈을 크게 떠서 잠깐 놀라움을 표시했으나, 곧 이어 무척 반가워 하는 표정을 지으며 곡의 내용에 대하여 이것저것 마구 질문해댔다. 그때마다 막힘없이 유창하게 흘러나가는 대답. 성대를 울리며 목구멍에서 쪼르르 굴러나와 유연한 혀놀림에 다시 한 번 굴렁쇠 구르듯 굴러서 빠져나가는 그 소리들이 하도 매끄러워서 지윤은 스스로 놀라웠다. 마치, 자신의 성대로부터의 발성이 아니라 가까운 곳에 있는 고양이의 갸르릉거리는 소리를 듣는 듯했다.
 
『음악을 전공하셨나 봐요?』하는 그녀의 질문에,
『전공했다기보다는 그냥 좀 좋아하는 편이죠.』하고 즉각 대답했으나 저만치서 중년사내가 듣고 있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금방 거짓말이 탄로나고 만 아이의 심정이 되었다. 그는 서류정리를 하고 있었는데, 이쪽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척하고 있긴 했지만 일순 그의 입가에 의미 있는 미소가 번지는 것은 그가 대화를 엿듣고 있다는 산 증거. 그렇다 해서 한 번 내뱉은 말을 다시 고치고 싶지는 않았다.
「될대로 되라지.」

그 일로 은주는 지윤의 저력에 대하여 꽤나 존경심을 갖게 되었다. 그후, 은주 역시 굳이 오전 시간을 골라서 학원에 들나 들게 되었다. 오로지 지윤이와 맞닥뜨리기 위한 속셈임이 분명했다. 지윤으로서는 그러한 변화가 다소 성가신 면이 없지 않았다.
카노(A. Cano), 코스트(N. Coste), 카룰리(F. Carulli)의 연습곡들은 「바이엘(Bayer) 피아노 교본」을 연상케 했으나 그 단순성에도 불구하고 기타의 음색과 잘 어울리는 음악적 특성으로 인해 은연중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자아냈으며 그냥 흘려버릴 수 없는 매력을 느끼게 했다. 아무튼, 동요보다야 한결 체면이 서는 연습곡들이었다.

중년사내의 촌티나는 생김새부터가 그에게서 재치있는 입담을 기대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으나 화재가 음악에 대한 것일 때에 한해서는 다소 사정이 달랐다. 그는 의외로 풍부한 이야깃거리들을 찾아냈을 뿐만 아니라 가끔은 농담까지 겻들이는 여유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야기에 열중하고 있을 때에도 지윤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일이 거의 없이 주로 그녀의 발을 응시하는 편이었는데, 그것이 흠이라면 흠이었다. 「습관일까?」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그러한 태도는 마치 그가 상대를 의식하지 않고 스스로를 향해서 독백하고 있는 듯해서 어떤 때는 무시당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스스로 자신의 농담이 먹혀든다고 느낄 때에 한해서 그것을 확인이라도 할 속셈인지 겸연쩍어 하는 미소와 함께 고개를 들고 잠깐 동안 상대를 쳐다 보는 경우는 있었다. 하긴, 그 미소란 것도 미소인지 웃음인지 확실치는 않았지만. 아마 그 경계선쯤에 해당될 것이다.

기타에서 발현되는 다양한 음색을 귀동냥한 것은 피아니스트로서의 그녀에게 무척 도움이 될만한 것이었다.
파가니니. 젊은 시절, 수년(1801~4)간 어떤 귀부인과 은거생활을 하며 기타 연주에만 몰두했다던 파가니니(N.Paganini, 1782~1840).
악마에게 혼을 팔고 대신 귀기(鬼氣) 서린 테크닉을 얻었다던 바이얼리니스트 파가니니의 화려한 기교와 매혹적인 음색 뒤에는 기타(guitar)로부터 얻어낸 마법이 숨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는 어렸을 때 이미 기타를 배웠던 것이다. 파가니니는 끝내 자신의 바이얼린 연주법에 대한 비밀을 공개하지 않았다지만, 화려한 겹음과 남달리 아름답고도 다양한 음색 그리고 연속적인 화음 연주등, 기타(guitar)음악을 연상케 하는 이러한 그만의 특징적인 면모는 기타(guitar)로부터 얻어낸 마법이 적지 않았을 것임을 추측하게 했다. 인색하기로 놀부 뺨칠만 했던 파가니니가 어느날 무명의 한 첼리스트에게 연민의 정을 느껴 단 30 분 동안 테크닉의 비결을 은밀히 가르쳐 준 일이 있는데, 그 첼리스트가 그후 일약 세계적인 첼리스트로 변신했다지 않던가. 왠 망상? 지윤은 날뛰는 토끼처럼 이리저리 멋대로 비약해대는 생각의 꼬리를 뒤쫓는 짓거리를 잠시 넋을 놓고 즐겼다. 오늘 중년사내는 파가니니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주었었다. 누구든 웬만큼은 알고 있는 파가니니였지만, 중년사내의 이야기에는 좀더 구체적이고 색다른 관점들이 있어서 들어줄만 했다. 생각난 김에 잠들기 전에 파가니니를 한 곡 들어 볼까 하다가 쇤베르크(Arnold Schoenberg)로 마음을 바꾸었다. 잠자리 음악에 어울릴만한 파가니니의 곡이 생각나지 않았던 것이다. 정야(淨夜, Transfigured Night, Op.4)를 들으며 그녀는 잠들었다. 쇤베르크의 정야(淨夜, 정화된 밤)는 데멜(Richard Dehmel)의 시(詩)를 바탕으로 한 교향시 형식의 곡이다.

「두 사람이 나뭇잎이 시들어 싸늘한 느낌을 주는 숲속을 거닐고 있습니다. 달빛을 가릴만한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달은 높은 떡갈나무 위를 달립니다. 여자가 이야기합니다. 저는 임신 중이지만, 아이는 당신의 아이가 아니예요...」
☆ ☆ ☆
피아니스트로서의 경험은 때로는 기타 공부에 방해가 되는 경우도 없지 않았지만 대체로 눈에 띄게 빠른 진척이 가능하도록 해 주었다. 지윤은 적어도 그렇게 느꼈다. 거북이처럼 엉금엉금 기는 것이긴 했지만 그런대로 시간은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연주자세가 웬만큼은 자리잡혀 가고 있음을 스스로 느낄 정도가 되었노라 자신하고 있었던 터였는데, 어느 날 그러한 자부심을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사건이 벌어졌다.

처음엔 이제 고작 한 달이 지났을 뿐인데 웬 세하주법을 가르쳐주나 싶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그 황당함과 고통스러움이란... 진정 잔인하고도 무식한, 네안데르탈인에게나 적용할만한 무시무시한 교수방법이었다. 「해부학적인 원리에 기초한 노하우(know-how)」나 「세하주법에 대한 과학적인 이론」은 다 어디로 갔는지. 촌스럽게 생겨 먹은 그 중년사내가 겉보기와는 달리 교활한 본성을 드디어 드러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는 레슨이 있는 날이면 하루도 거르는 일 없이 고문하기로 작정한 것 같았다. 그녀가 겪은 끔직한 고통을 어찌 필설로 다할까. 그 경험을 십분 이해하기 위해서는 독자 여러분께서 반드시 그 과정을 그대로 따라 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런 이유로 필자는 문제의 발단이 된 그 연습 과제를 소개해야 할 사명감을 느낀다.

중년사내는 지윤의 왼손에다 집중적인 고문을 가했던 것이지만 그에 앞서 먼저 오른손 운지부터 익히는 것이 순서다. 오른손의 연주방법에 익숙해져 있어야 왼손에 효과적으로 고문을 가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 중년사내는 이와 같이 사전준비를 철저히 해 두는 치밀함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악보6. 개방현을 이용한 오른손 연습

 
악보6을 연주해 보도록 하자. 모두 개방현으로 되어 있으므로 왼손운지는 필요가 없다. 요령은 다음과 같다. 연주하기 전에 먼저 i,m,a손가락을 ③,②,①번선에 가볍게 올려 놓은 다음, p로 ⑥,⑤,④번선을 차례로 뚱기는데 ⑥,⑤번선은 아포얀도 주법으로 그리고 ④번선은 알·아이레 주법으로 뚱긴다. 이어서 ④번선을 뚱긴 p를 원래의 위치로 되돌리는 동작과 함께 i,m,a손가락으로 차례대로 ③,②,①번선을 뚱기면서 선에서 떼어낸다. 이른바 전형적인 상행 아르페지오 연주방법 그대로다. 여러 차례 되풀이 연습하여 오른손가락의 탄현 동작에 충분히 익숙해지도록 한다.
오른손 연주 요령에 충분히 숙달되었다면 이제 왼손 운지에 대하여 알아 보기로 하자. 그림1에서 보듯이 1번손가락으로 지판의 1번 프렛을 세하(Ceja)로 짚고 오른손으로 악보6과 같이 연주하면 악보7에 해당하는 연주가 이루어진다. 개방현과 제1프렛 간의 음정 차이가 반음정에 해당하므로 악보6의 음들을 모두 반음씩 높이면 당연히 악보7과 같이 되는 것이다.

그림1. 1프렛 세하




악보7


이때 2번손가락을 1번손가락에 겹치듯 붙여서 1번손가락의 세하를 돕는다든지 하는 꽁수를 써서는 안된다. 1번손가락을 제외한 나머지 손가락들은 선을 누르는 일 없이 자연스런 자세를 유지하도록 한다. 마찬가지 요령으로 2, 3프렛을 세하로 짚고 연주해 보도록 한다 (그림2, 그림3).


그림2. 2프렛 세하





그림3. 제3프렛 세하
 

이제 왼손운지 요령도 익혔으니, 고문을 위한 사전 준비는 대체로 마무리된 셈이다. 지금부터 독자 여러분도 함께 동참하여 사이 좋게 그리고 본격적으로 왼손에 고문을 가해 보도록 하자. 악보8이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전지윤, 그녀가 그토록 치를 떨었던 바로 그 「세하 고문」또는 「해부학적 고문」의 실체다. 제1포지션에서 시작하여 제9포지션으로 그리고 다시 제1포지션으로... 악보8을 되풀이 하면 된다. 4분음표=60보다 빨라지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악보8. 1번손가락만의 세하로 1포지션↔9포지션 왕복 연습하기

아직도 악보8이 왜 고문일 수 있는지 감(感)을 잡지 못하는 독자분도 없지 않을 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지금부터 고문의 현장으로 안내하도록 하겠다.
 


고문의 현장

 
지윤은 길가를 장식하고 있는 화단에 활짝 핀 꽃들을 보고 그 아름다움에 새삼 감탄하며서 그리고 화창한 초여름의 싱그러움을 폐부 깊숙히 들이마시면서 그렇게 학원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런 상쾌한 기분은 학원으로 오르는 계단 입구에 들어서기 전까지만 허용되었다. 계단에 발을 내딛는 순간, 오늘도 변함없이 예의 그 「해부학적 고문」으로부터 레슨이 시작될 것이라는 암시가 곰팡이 내음처럼 계단 구석구석에서 스며나오기 시작하기 때문이었다. 나무 계단이 삐걱거릴 때마다 그것은 음산한 신음소리 그 자체로 들렸다. 그래서 지윤은 속이 상했다.

제1포지션에서부터 시작하여 제9포지션에까지 도달하면 다시 하강하여 제2포지션에 이르기까지 악보8을 티없이 깨끗하게 소리내면서 도돌이하지 않고 한 번 연주하는 것은 누구나 해 볼만한 워밍업 정도의 연습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쉬지 않고 계속 다시 1회를 더 오르내리면 집게손가락과 엄지손가락 사이의 근육 뭉치가 돌덩이처럼 굳어지면서 감각이 없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다시 1회 더 추가하여 오르내리기를 반복하면 통증으로 인해 더 해볼 의욕을 상실하고 만다. 하지만, 연습이 결코 거기서 중단되는 일은 없었다. 그때부터 비로소 진정한 고문이 시작되는 것이었다. 그녀는 6회를 반복할 때까지 계속해야 했다. 대략 5분 정도의 시간이 걸리는 연습이지만 4회 이후부터에 해당하는 2~3분간은 그야말로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오금이 저려오고 나중에는 뱃가죽에 경련이 일어났다. 뱃가죽에 경련까지 일어나는 상황은 정말 그녀로서는 난생 처음 경험해 본 것이었다. 독자 여러분께서도 이 글에 설명되어 있는 바 그대로 정확하게 따라 하신다면 이 희귀한 경험을 즐겨(?) 보실 수 있다. 꽁수는 일체 통하지 않았다. 2번손가락을 슬며시 1번손가락에 붙여서 힘을 보탤라치면 중년사내는 으레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수법을 동원했다.

『바르지 못한 자세로 소리를 내어서 서툰 솜씨를 숨기느니, 나 같으면 차라리 소리가 나지 않는 한이 있어도 바른 자세로 연주하며 자신의 부족함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편을 택하겠어요. 관객이 연주자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도록 그 계기를 연주자 스스로 제공하는 것은 정말 위험천만한 어리석음이지요. 왜냐하면 그 관객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 다음 번에는 더 잘해야 될 테고, 적어도 전보다 못하지는 않아야 할 테니까, 또 눈속임을 해야 하는 악숙환을 자초하는 것이거든요.』

그는 자존심을 건드리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책장에 심리학 관련 서적이 없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그가 한 말의 내용을 거두절미하고 나면 남는 것은 다름아닌「솔직해라 !」는 것이었다.
정말 죽을 맛이었다. 지윤은 속이 상했다.「혀를 깨물고 이 자리에서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끝까지 버티어내고 말리라 !」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손가락 근육들의 입장은 그게 아니었다. 마치 다른 사람의 손가락이기라도 하듯 주인에게 마구 반항하고 있었다. 하극상! 아무리 왼손의 운지자세를 바르게 하려 해도 어느 샌가 2번손가락이 슬며시 1번손가락 곁으로 가 붙기 일쑤였다. 그럴 때면 으레, 어디선가 읽었던 살아서 꿈틀거리는 마로니에와 로캉탱에 대한 귀절이 생각났다.

「소리가 나지 않는 한이 있어도 바른 자세로... ?」, 어차피 4번째 오르내리기를 시작할 즈음에는 결코 그것이 정상적인 소리일 수 없었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이미 독자 여러분은 그게 어떤 소리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틱, 틱, 틱... 」 고통은 극에 달하고 있고, 힘을 주든 말든 어차피 그 소리가 그 소리이니 잠시 손가락에 힘을 빼고 눈가림으로 세하를 하고 있는 척하고 있을라치면 그는 귀신 같이 그것을 눈치챘다.
『예술적 자긍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스스로를 속이는 짓이 가장 부끄러운 일이지요.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지윤은 정말 속이 상했다. 이쯤되면 뚜껑이 열리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돌아버린다. 중년사내는 서슴지 않고 비수를 들이대는 것이었다. 더욱 참을 수 없는 것은 결코 그가 화를 내거나 나무라는 듯한 말투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촌스럽게 생겨먹은 상판에다 오히려 다소 겸연쩍은 듯 수줍어 하는 내숭까지 떨면서 나지막한 어조로 말했다. 멀리서 누가 지켜 본다면 연인 사이의 대화로 착각할 것이었다. 다정스럽게 미소 지으면서, 그러나 그 미소로 인해 상황을 오판해버린 순진한 상대의 명치를 시선 아래에서 슬쩍 들이민 칼로 사정없이 찔러버리는 장면은 갱영화에서 가끔 볼 수 있긴 하지만...

다른 과제곡들에 대해서는 잠시 설명하고 몇 가지 고칠 것 수정해 주고 나서는 한동안 혼자 연습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상례였다. 하지만, 이 「세하 고문」에 대해서는 그리하지 않았다. 중년사내는 고집스럽게 마주 앉아서 한 음 한 음 또박또박 호흡을 같이 하며 함께 연주했다. 그러다 지윤의 기타에서 틱틱거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하면 그는 더욱 명료한 소리로 그리고 크리센도하면서 뚱겼다. 마치 제대로 연주하라는 무언의 협박처럼. 특기할만한 사실은 그러한 그의 태도는 세 번째 오르내리기가 완료될 때까지로 한정된다는 것이었다. 이는 그나마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는데,
네번째 오르내리기를 시작할 때부터는 그녀가 진지하게 열심히 하고 있는 한 그 소리야 어떻게 나오든 무방하다는 식이었다. 여러 날을 두고 관찰한 결과 이와 같은 그의 태도는 거의 공식적인 것으로 보였다.

아무튼 5분간의 고문이 끝나고 나면 4,5분 정도 쉬게 했다. 이 휴식시간을 이용하여 그는 기타 음악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들려 주는 것이었다. 마치 회초리를 때리고 난 다음, 맞은 아이를 달래 주는 어른처럼. 또는 졸병들에게 모진 기합을 주고 나서, 술자리 만들어 기분을 풀어 주는 고참병처럼. 그러나 그럴수록 아이나 졸병은 더욱 불안해지기 마련이다. 그랬다. 이것은 다시 한 번 「세하 고문」을 되풀이하기 위한 준비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언제나 이 4,5분 간의 휴식 후에는 다시 그 지긋지긋한 고문이 한 번 더 되풀이 되었다. 마지막 남은 피 한 방울까지 다 쥐어짜는 듯한 두 번째 고문이 끝나고 나면 ― 그는 해부학에 정통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 지윤은 맥이 풀림과 동시에 현기증과 두통을 느꼈다. 그런데 묘한 것은, 그러면서도 그날 몫에 해당하는 고문이 다 끝난 데 대한 안도감이 전신을 감싸면서 짜릿한 행복감이 밀려 드는 것이었다. 이반·데니소비치가 아마 그랬을 것이다. 그리고 한동안 쉬고 나면 즐거운 연습이 기다리는 것이었다. 과제곡 연습은 마냥 즐거웠다. 어쩌면 그것은 지독한 고통을 겪은 데 대한 심리적 반사이익 같은 것인지도 몰랐다. 발목에 모래주머니 차고 뛰기, 원산폭격, 뻘밭에서 구르기, 가시철망 그물 아래로 포복 등 입에 단내가 나도록 지독한 훈련을 통상적인 일과로 하는 훈련병에게 있어서, 행군은 즐거운 산책일 뿐이다.
그런데, 참으로 감탄을 자아내는 사실은 이 두 번의 고문이 가해지는 동안 중년사내 역시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연주하는 것이었지만 그는 전혀 힘든 기색이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완된 자세를 유지했을 뿐만 아니라 그 운지법이 하도 가볍고 날렵해서 마치 지판 위에 나비가 날아다니는 듯했다. 세하를 하고 있는 1번손가락은 선을 누르는 듯 마는 듯 했지만 그 소리는 항상 맑고 깨끗해서 흠잡을 데가 없었다.

아무튼 지윤은 이를 악물고 나름대로 저항했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그녀는 끝내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끝까지 견디어낼 것이라 다짐했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끝날 때쯤에는 미소를 지어보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녀가 품위를 잃는 일은 결코 없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와서 긴장이 풀리고 나면 사정이 달랐다. 그녀는 속이 상했다. 한 번은 설움과 울분이 한꺼번에 치밀어 올라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No.14(c#단조) 제3악장(Presto agitato)을 다이너마이트 터뜨리듯 마구 두들겨 연주해 보았으나 그래도 채 분이 풀리지 않아 눈물을 찔끔질끔 흘리다 그대로 건반에 엎드려 잠든 적도 있었다. 그때 꿈속에서 중년사내를 보게 되었는데, 중년사내는 어쩐 일인지 피아노를 배우는 까까머리 학생으로 등장했다. 지윤은 그가 건반 위에서 손가락을 더듬거릴 때마다 호되게 쥐어박고 꾸짖고 했는데, 너무 심하게 나무란 것 같아서 나중에는 연민의 정을 느낄 정도였다. 그는 건반 위에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게 보기에 안스러워서 아기를 품에 안듯이 포근히 감싸 안고 달래다가 화들짝 놀라서 깨어났다. 「으~흐,흐,흐..., 이런 망측한 일이. 내가 원 세상에... 그 촌스럽게 생겨먹은 늙은 사내를 품에 안다니, 말도 안돼 !」

이 일이 처음에는 로망스를 연주해 보고 싶은 욕심에서 시작되었던 것이었지만,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 보니 로망스에 대한 관심은 이제 거의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그렇다면 왜 굳이 그런 곤욕을 치르면서까지 중년사내를 찾아 가야 하는 지 스스로 자문자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장에라도 그만 두면 될 일이었다. 미친 개에게 물린 셈치고 잊어버리면 그뿐이었다. 해서, 하루를 빼 먹게 되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촌스럽게 생긴 얼굴이, 그 어줍은 미소가 자꾸 눈에 어른거리는 것이었다. 「예술적 자긍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스스로를 속이는 짓이 가장 부끄러운 일이지요.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그가 뒤에서 겸연쩍어 하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는 듯했다. 지윤은 속이 상했다. 이제는 로망스가 문제가 아니었다. 자존심이 깃발처럼 허공에서 나부끼고 있었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그럭저럭 그러한 고통을 한 달쯤 겪은 어느날이었다. 기약없이 그러한 고통이 계속된다는 것은 정말이지 참기 힘들었다. 지윤이 물었다.
『선생님, 이 골병 들 연습은 언제까지 해야 하나요? 시간이 지나면 점점 나아질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군요. 한 달이 지났는데도 힘들기가 처음과 별반 차이가 없어요.』
『그건... 그래요, 내공을 몰라서 그래요. 내공이 길러지면 그러한 고통은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리거든요.』
그는 수수께끼 같은 대답으로 응수했다.
『내공이라니요?』
지윤은 어이가 없었다. 내공이라니. 「지금 내가 뭔 짓거리를 하고 있단 말인가?」
『맞아요. 내공을 이해하면 저절로 해결될 문제지요. 그런데, 지금쯤은 내공의 문턱을 넘어서야 하는 것인데...』

그가 혼잣말 하듯이 중얼거리고 있을 때, 마침 은주가 들어 섰다. 중년사내는 반색을 하며 그녀를 불러서 가까이 앉게 한 다음 말했다.
『은주야, 내공 수련 좀 함께 해 보지지 않으련?』
『내공 수련요? 그것 좋지요. 오랜만이긴 하지만, 함께 해 보죠, 뭐.』은주가 맞장구쳤다.
「그래, 너희들 사제 간에 죽이 척척 맞는구나」. 지윤은 왠지 마음이 불편했다.

해서, 참으로 음악다운 구석이라고는 어디 한 군데 찾아 볼 수 없는 악보8을 두고 얄궂게도 세 사람이 합주하는~기막힌 단성부 아르페지오를 두 명의 프로와 또 한 사람의 아마추어가 합주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그런데 정작 지윤을 참을 수 없게 만든 것은 오로지 세 사람 중에서 그녀만이 골육을 비트는 듯한 고문을 받고 있다는 자각이었다. 중년사내야 내공이 출중해서 그렇다 치자. 하지만 은주까지도 그렇게 잘 연주해내리라고는 정말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 하긴, 은주 역시 마지막에 가서는 힘들어 하는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그녀는 끝까지 제대로 연주해냈다. 젖먹던 힘까지 다 끌어대느라 얼굴색이 흙빛으로 변해 끙끙거리고 있는 것은 자신 뿐이었다. 더욱이 중년사내와 은주는 힐끔힐끔 눈치를 살피며 서로 공범자의 미소를 나누고 있지 않은가. 끝내 혼자만 왕따 당하고 만 것이었다. 참혹한 느낌, 그녀는 속이 상했다. 정말 속이 상했다.

보통 때 같으면 즐거웠을 과제곡 연습조차 제대로 손에 잡히지 않았다. 연습 도중 내내 그 「내공」이라는 말 같지도 않은 선문답에 시달려야 했다. 중년사내에게 좀더 캐묻고 싶었지만, 그때마다 망서리기만 하다가 끝내 말문을 열지 못했다. 곁에서 빌라로보스를 연습하고 있던 은주, 그녀의 존재 자체가 자꾸 자존심을 의식하게 했다. 그런데, 지윤의 머리에 언뜻 섬광이 스치고 지나갔다. 공범자의 미소. 그랬다. 그것은 단서가 되기에 충분한 재료였다. 놓쳐서는 안될 실마리였다.
학원을 나설 때, 여늬때처럼 따라 붙는 은주가 그날따라 싫지 않았다. 불감청(不敢聽)이언정 고소원(固訴願)이라.
동네 커피숍이었지만, 헤이즐넛 커피 맛이 일품인 곳이었다. 사람들의 방해를 받지 않을만한 별실을 택해 자리잡았다. 밖이 훤히 내다보이는 폭넓은 창밖으로 길가는 사람들을 흘낏 쳐다보며 지윤이 먼저 말을 꺼냈다.
『은주야, 일찌감치 이실직고해. 그 내공이라는 말에 숨겨진 뜻이 있을 거야. 내 말이 틀림없지?』
『눈치채셨군요, 언니. 호, 호 ! 하지만, 맨 입으로야 곤란하죠. 사돈은 뭐 논 팔고 밭 팔아서 장사하나요?』
『그래, 알았다 알았어. 내가 한 잔 거하게 살 게. 좀 가르쳐 주라, 그 비밀.』
은주는 연신 재미있다는 듯 생글거렸다. 한동안 그렇게 뜸을 들이다가 한 마디 귀띔을 했는데...
『언니, 만일에 말예요. 이만기장사라 할지라도 두 손을 번쩍 쳐든 채 두어 시간을 그렇게 벌서듯 하고 있으라면 견딜 수 있을까요?』
『그야 견디기 어렵겠지. 그걸 말이라고 하냐. 그리고 이만기도 이젠 한 물 갔더라, 얘.』
『하지만 말예요. 5분마다 2, 3초씩만이라도 팔을 내렸다가 다시 들게 한다면 어떨까요. 굳이 이만기장사가 아니라도 말이죠, 그냥 보통 사람도 그리한다면 쉽게 견딜 수 있지 않겠어요? 비밀의 열쇠는 바로 그기 있는 거예요.』
『?????』
『포지션을 옮기는 순간마다 세하를 위해 1번손가락에 가했던 힘을 완전히 빼고 100% 이완시켜서 이 손가락을 쉬게 하는 것이죠. 비록 눈 깜짝할 순간에 지나지 않는 휴식이지만, 요령을 잘 익히면 그 찰나를 이용하여 손가락의 힘을 웬만큼은 리크리에이션할 수 있어요. 그래서 손가락근육에 피로가 누적되지 않으니 세하를 계속해 나갈 수 있는 거죠.』

『 ! 』
순간, 지윤의 뇌리에는 몇 가지 영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렇다. 그것은 충분히 시험해 볼만한 아이디어였다. 더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아, 그걸 몰랐다니...」 일견 별 게 아닌 것 같지만, 정말 신통한 생각이 아닐 수 없었다. 은주가 그러한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조심스럽게 그러나 여전히 장난기 어린 말투로 덧붙였다.

『하지만 말예요, 언니. 언뜻 보기에는 매우 단순해 보일지 모르지만 그 초식에는 의외로 변화의 여지가 많고 또한 미묘한 구석도 있어요. 그리고 위험한 함정도 도사리고 있죠. 그래서요,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돼요. 어쨌거나 그 초식을 제대로 익히지 못하면 상승의 경지에까지 도달하는 데 지장이 있어요. 저는요, 대충 알고 있긴 하지만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수준은 못되거든요. 머지 않아 선생님께서 자세히 가르쳐 드릴 거예요.』

『허, 달마가 따로 있는 게 아니구나. 거참 ! 이른바 역근경(達摩易筋經)을 통하여 제대로 익히란 말씀이렸다 ! 암튼 고마워. 많은 도움이 됐어.』지윤이 그녀의 장난기에 은근히 장단을 맞추어 주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그동안 견디기 힘든 고통을 겪고 있음을 익히 알면서도 그와 같은 초식(?)의 비결을 일체 가르쳐 주지 않았던 중년사내에 대하여 은연중에 부아가 끓어 오르고 있었다. 중년사내의 촌스럽게 생겨 먹은 얼굴이 그리고 어줍은 그 미소가 떠올랐다. 어딘가 잘못 빚어진 구석이 있긴 한데 꼬집어서 그게 어디라고 말할 수는 없는 얼굴. 조물주가 그의 얼굴을 빚던 중 깜빡 졸았거나 아니면 귀찮아서 채 마무리짓지 않았을 것이다.
『'상승의 경지'라면 본격적인 세하 주법을 말하는 것이겠구나. 그치? 난 언제쯤이면 그러한 것을 배우게 될까?』
『맞아요. 그런데 지금 연습하고 계신 것이 이를테면 세하 주법을 가르치기 위한 터 다지기 같은 것이걸랑요. 본격적인 세하 주법은 좀더 기다리셔야 할 거예요. 그러니까, 내공을 키워 가는 방법도 배우셔야 할 것이고 그리고 내공이 충실해질 때까지 또 시간이 걸릴 것이고... 하지만, 정작 세하 주법의 여러 가지 기법들을 배울 때는 전혀 힘들지 않아요. 오히려 즐거움이 넘치죠. 그처럼 쉽게 세하 주법을 구사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할 것이고요. 그 점은 제가 보장하죠.』
『3개월 정도 지나면 세하 주법을 가르쳐 주기로 했었는데, 이러다간 한 세월 더 걸리겠다, 얘.』
지윤이 혼잣말 하듯이 볼멘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포지션을 옮길 때마다 손가락에 힘을 빼고 이완시키면 그 사이에 음이 끊어지지 않을까? 아니면 말을 바꾸어, 음이 끊어지는 현상이 더 드러나고 심해지지 않을까... 라고 해야 하나?』
『그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돼요. 포지션이동의 순간에 손가락에 힘을 주든 말든 어쨌든 포지션이동은 하는 거 잖아요? 나중에 배우시게 될 테지만, 포지션을 이동할 때에는 반드시 손가락에 힘을 빼고 해야 하거든요. 특히 동선(銅線)이 감긴 ④~⑥번선을 짚은 다음 포지션을 이동할 때에는 손가락에 가해진 힘을 빼야 할 뿐만 아니라 손가락을 아예 선에서 떼야 해요. 그리하지 않으면 잡음이 나게 되죠. 손가락이 선을 스치는 잡음 말예요. 아무튼 포지션이동이 행하여지는 그 짧은 순간을 힘의 회복에 이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걱정은 기우에 지나지 않아요. 그리구요... 노파심에서 말씀드리는 거지만, 그 초식이 보기보담 간단치 않아요. 호, 호 ! 』
 
 

도제 수업

 
지난 이틀간 혼자서 이 궁리 저 궁리 해가며 초식을 검토하고 열심히 연습한 덕분인지 아직 힘들기는 했지만 놀랍게도 다섯번까지는 소리를 제대로 낼 수 있었다(악보9). 적어도 표정을 일그러뜨리는 일없이.
 

악보9. 세하로 제1 ↔ 9 포지션 왕복하기

 
그러나 여섯 번째는 아무래도 무리였다. 신통하게도, 포지션을 옮기는 순간마다 잠깐씩 손가락에 힘을 빼고 이완시키는 것만으로 상황이 확연히 달라졌다. 고통이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은 아니었지만, 이제 고문이라 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러한 변화가 단지 이틀, 이틀만에 이루어질 수 있다니!」 이 노하우 (know-how)의 나머지 부분에 대한 지윤의 지적(知的) 호기심은 그녀를 꽤나 조바심나게 했지만, 그러한 비결을 일찌감치 가르쳐 주지 않고 그녀를 고통 속에 그대로 방치해 온 중년사내의 미필적 고의(未必的故意)에 대한 의구심이 견제작용을 했다. 말하자면, 성취감에서 오는 희열이 의구심과 함께 치미는 불편한 심기로 인해 상쇄되어 그녀로 하여금 유보적인 과묵한 태도를 견지하도록 만들었다.

그녀를 지켜보던 중년사내가 의미있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윤씨, 축하합니다. 드디어 요령을 알아내셨군요. 그동안 정말 수고 많았어요.』 말을 하면서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책상 쪽으로 갔는데, 섬세하게 생긴 연마용 줄과 칼 사포(sand paper) 등의 작은 공구들을 꺼 냈다. 그리고, 지윤의 기타를 건네 받아서 책상 위에 올려 놓고는 상현주(上絃柱 nut)와 하현주(下絃柱 saddle 또는 bridge bone)를 손질하여 그 높이를 섬세하게 재조정했다(그림4).
 

그림4. 상현주(nut)와 하현주(saddle 또는 bridge bone)

 
상현주(nut)의 패인 홈(기타선이 끼워져 지나는 곳)을 손질할 때는 제1포지션 위치에 10원짜리 구리 동전을 올려 놓고 그것을 참고로 하여 그 위를 스칠 듯 지나는 기타선의 높이를 가늠해 가며 조심스럽게 다듬질했으며, 하현주(saddle)를 갈아서 높이를 낮출 때는 제12프렛(fret) 에서의 기타선과 프렛 간의 간격~그 내경(內徑)에 특히 유의했다 (※ 하현주를 손질할 때에는 기타선을 적당히 풀고 하현주를 브릿지에서 빼내어 유리와 같이 평평한 바닥에 사포를 깔아 놓고 그 기에 하현주의 바닥 부위를 조심스럽게 문질러서 갈아야 하며, 기타선을 풀 때에는 앞판과 브릿지의 접착 부위에 선의 장력 변화로 인한 충격이 급격하게 가해지지 않도록 선을 점진적으로 서서히 풀어야 함). 지윤은 중년사내가 의외로 매우 꼼꼼하고 섬세한 성격의 소유자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가 정성을 다해 그러한 수고를 하고 있는 것을 보는 동안, 지윤은 마음이 많이 누그러졌다. 그렇다 해도 따질 건 따지는 것이 앙금을 남기지 않는 현명한 태도일 것이었다.
 
다듬기를 끝내고 중년사내는 기타선을 다시 조율한 다음, 음계와 화음 등을 뚱겨 보아 제대로 되었는지 시험했다. 이윽고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그가 말했다. 『원만한 왼손운지를 특히 세하 주법을 위해서는 지판에 대한 기타선의 높이가 적절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적절한 정도란 것이 악기의 공명 특성이나 연주자의 터치가 갖는 특성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매우 미묘한 문제라 할 수 있어요. 그래서 상현주와 하현주를 손질할 때는 극도로 조심해야 하며, 전문가적인 안목이 없이는 함부로 건드리지 않는 것이 좋아요. 자칫 실수하면 부속 자체를 못쓰게 만들어버리기 일쑤거든요. 뿐만 아니라 하현주(saddle)의 경우에는 그 높이에 따라 악기의 음질이 달라지는 경향도 있습니다. 아무튼, 상·하현주의 높이가 적절하지 못하다고 생각될 때에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이 바람직해요. 악기 제작가에게 부탁하는 것도 좋겠죠. 특히, 값비싼 연주용 악기일 경우에는 절대로 함부로 손대서는 안됩니다. 악기를 버려 놓을 수 있거든요. 』 기타를 건네 받은 지윤이 시험해보니 이전과는 그 느낌이 어딘가 달랐다. 왼손 운지가 훨씬 부드럽고 편하게 느껴졌는데, 마치 자신의 악기가 아닌 듯했다. 그녀가 감탄하며 말했다. 『훨씬 편하게 선을 짚을 수 있군요 !』 일순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꼈지만, 그렇다 해서 은근히 치미는 부아가 사그라진 것은 아니었다. 기회를 놓칠세라 그녀가 퉁명스레 쏘아 부쳤다.

『근데, 왜 애초에 이렇게 손질해 주시지 않으셨어요? 그랬다면 그동안 고생이 훨씬 덜했을 텐데요... 그리구요, 그 '내공'이란 것도 그래요. 은주를 꼬셨더니만, 한 술 더 떠서 초식이 어쩌구저쩌구 하더군요. 내공이든 초식이든, 암튼 그러한 요령을 미리 귀띔만이라도 해주심 어디가 덧나나요? 정말 잔인해요. 뻔히 고생하는 것을 보고서도 그냥 내버려 두는 심사란...』 「심뽀란...」이라고 내뱉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 못하고 머뭇 거리다 「심사란...」이라는 단어로 대신했는데, 그 때문에 목에 뭐가 걸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가 잠시 곤혹스런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음, 제가 욕을 먹어도 싸지요. 하지만, 어느 정도는 그러한 고통을 겪어 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요. 갈증이 심할수록 물에 대한 고마움도 커지니까요. 이완(relax)이란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절실히 느낄수록 그만큼 테크닉이 정교해지거든요. 근육의 긴장과 피로 그리고 이완과 회복, 이들의 상관관계를 뼈에 사무치도록 생생하게 경험해 볼 수 있는 기회가 그리 흔한 것은 아니어서. 그런데 사실은 지윤씨의 경우는 그 기간이 좀 길어진 느낌이 있어요. 제가 가르쳐 드리는 것보다는 스스로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하지만,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많이 망서리긴 했죠.』
 
그가 말을 멈추었다. 그러나 뭔가 미흡하다고 생각했는지 지윤의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일부러 궁리해낸 듯한 말을 덧붙였다. 『지윤씨도 다른 사람들처럼 여럿이 함께 어울려 연습하는 환경에서 연습을 해왔다면 일찌감치 감(感)을 잡았을 거예요. 그런 환경에서는 사람이 많은 만큼 다양한 경우가 표출되기 마련이니까, 그래서 보다 쉽게 요령을 발견하게 되지요. 그리고요, 지윤씨의 꾀를 부릴 줄 모르는 정직한 성격 또한 고통스런 상황을 연장시키는 데 한 몫을 했겠죠?』
지윤은, 교묘하게 자존심을 건드려서 은연중 고지식한 방법을 강요하곤 했던 그가 그러한 말을 하는 것이 다소 놀라웠다. 「정직한 성격 탓이라니」. 그가 다시 말했다. 『포지션을 옮길 때마다 손가락을 순간적으로 잠깐씩 이완시킴으로써 피로의 누적을 막고 힘을 회복할 수 있다는 사실. 이는 깨달음의 시작에 불과한 것일 테지만 어쩌면 모든 테크닉은 여기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 생각해요. 그러니, 진정 중요한 연습은 이제부터라 할 수 있습니다. 적지 않은 고통을 대가로 지불하고 얻어낸 깨달음 아닙니까. 이제부터는 그 이완을 보다 정교하게 그리고 다양한 모습으로 확장하고 발전시켜 나가야 합니다. 더 이상, 긴장 상태가 지속되는 상황을 생각없이 그대로 감수하거나 방치하는 경우가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러한 연습은 그동안 겪은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더 이상은 백해무익일 뿐이지요. 앞으로 진정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은 바로 이완에 대해서입니다.』
 
평소 때의 중년사내는 다소 어눌한 면이 없지 않았으나 관심 분야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만은 달랐다. 다소 느릿한 말투이기는 했지만 그것이 되려 사려깊은 인상을 주었으며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보면 그가 겉보기보다는 꽤나 설득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은연중에 깨닫게 되곤 했다. 그는 지윤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일이 없이 주로 그녀의 발을 응시하며 말했다. 지윤은 그러한 그의 태도가 신경에 거슬리곤 했으나 이제는 익숙해져서 무시해 버리는 편이 었다. 『그래도 너무 하셨어요. 저 같이 우둔한 사람이 그것을 스스로 깨닫게 되길 바라셨다니... 』 「우둔? 전형적인 내숭용 멘트 !」라고 생각하며 중년사내는 뭔가 좀더 해명이 필요함을 느꼈다.
『암튼 미안하게 됐어요. 하지만, 남보다 길어진 그 힘든 경험이 결코 손해 본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말아요. 세상사가 대개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단점은 곧 장점일 수 있고, 반대로 장점을 뒤집어 놓고 보면 단점이 되어버리곤 하지요.』 『현대 인류의 문명은 아시다시피 매우 복잡다양해졌어요. 지금에 와서야, 19세기 유럽 대학의 과학 교과서가 단 한 권으로 충분했다는 이야길 누가 믿겠습니까. 하지만, 당시는 물리 생물 화학을 한 권의 책에 수록했다더군요. 어떻게 상상이나 할 법한 일입니까. 그만큼 현대 사회가 복잡해지고 전문화되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겠지요.』
「지금 이이가 대체 뭔 말을 할려고 ?」화제를 갑자기 바꾼 중년 사내의 태도에 지윤은 아연실색했다.

『문명이 발달하고 복잡다양해지면서 교육이 직접경험보다는 주 로 간접경험을 가르치는 데 치중하는 식으로 변해 갈 수밖에 없음은 당연한 귀결이라 해야 겠지요. 복잡다양한 내용들을 일일이 직 접 경험하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그런데, 그렇다 해도 여전히 간접경험으로 직접경험을 대신할 수 없는 영역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를테면, 장인정신 같은 것이 그렇죠. 입문한 제자를 고의로 몇 년씩, 허드렛일로 머슴부리듯 부렸다는 옛 도공의 설화는 어쩌면 현대에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 바람직한 게 아닌가 싶어요. 그러한 고생을 겪게 하지 않고서야 달리 어찌, 도공으로서의 험난 한 길을 끝까지 좌절하는 일없이 의연하게 걸어 갈 수 있도록, 인내와 겸허한 태도 그리고 자기 성찰의 시각 등을 심어 줄 수 있겠습니까.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명품들을 볼 때마다 나는 기약없이 허드렛일을 하면서 인내와 자기성찰의 바탕을 다졌을 그 옛날의 어린 도공 지망생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중년 사내가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말을 이었 는데, 다음 말이, 그의 화술에는 항상 주제의식이 잠재되어 있어서 이야기가 다소 방향을 잃은 듯한 경우에도 듣는이가 전혀 불안해 할 필요가 없음을 깨닫게 했다. 『그동안 지윤씨가 악보9에 대한 연습으로 악전고투하는 것을 그 대로 방치한 것은 그와 같은 생각에서 오는 망서림 때문이었다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말하자면, 직접경험을 통해 가르칠 수밖에 없는 성격의 교육과정 중 하나로 이해해 달라는 말입니다만.』 중년사내는 드디어 지윤의 원망과 비난으로부터 사이드 스텝을 밟으며 가볍게 빠져나가 버렸다. 그의 교묘한 화술에 내심 감탄하여 지윤이 잠시 허탈한 표정을 지었으나, 여유를 주지 않고 사내가 새로운 화제를 끄집어 냈다.
 
 

힘? 그런 말 하덜 마소!

 
『그동안의 경험에 비추어 보아 세하를 할 때 손가락의 어떤 부위를 사용하는 것 같았나요? 다소 이상한 질문으로 들릴 지 모르겠군요. 말을 바꾸어 질문을 다시 하도록 할께요. 구체적으로 손가락의 어떤 부분을 강화하고 단련해야 세하를 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 일까요?』 『그야 뻔한 이야기가 아닌가요? 손가락 힘을 길러야죠, 뭐. 필요하다면 악력기를 사용해서라도. 아니면, 자꾸 세하를 반복하다 보면 1번손가락의 손바닥 부위 중 기타선에 의해 눌리워지는 곳마다 기계체조 선수들의 손바닥처럼 굳은살이 밸 테고 그러면 세하가 훨씬 쉬워지겠죠. 그렇지 않은가요?』

시큰둥한 기분에 지윤이 별 생각없이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그러나 말을 내뱉는 도중, 그가 뭔가 구체적인 설명을 위해 말머리를 꺼낸 것이 아닌가 하는 직감이 스쳤다. 생각하기 전에 말이 먼저 나가면 항상 손해보기 마련이다. 왠지, 동문서답이 되고 만 꼴이 아닌가 싶었다.
『그렇다면 손가락 힘이 센 사람은 처음부터 세하를 잘 하겠군 . 이를테면 역도선수나 씨름선수 같은 사람 말이죠.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아요. 손가락 힘이 아무리 세도 기술이 없으면 여의치 가 않은 것이 세하 주법이죠. 언뜻 세하 주법에 관한 한 기술보다는 힘이 우선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물론 세하 주법에 대한 감각을 익힌 다음에야 손가락 힘이 센 사람일수록 유리한, 그러한 측면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그것은 세하 주법을 어느 정도 익힌 다음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그리고 세하 주법으로 인해 손가락의 손바닥쪽 면에 굳은살이 배기는 일이란 웬만해서는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아요. 좀체 그런 일은 생기지 않으니까요.』 말을 마친 중년 사내가 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는 아마 그가 한 말을 뒷받침해 줄 설득력 있는 물증을 찾고 있을 것이었다. 지윤은 자신의 어리석은 대답으로 인해 이야기가 그 핵심을 벗어나고 있음을 깨닫고 조금 답답해졌다. 이윽고 중년사내가 눈빛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손가락 힘이 세하를 위한 필요 조건이거나 충분 조건이 아니라 는 사실은 성인의 기량을 능가하는 나이 어린 기타리스트가 존재하는 한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를테면, 불과 8살의 나이에 유럽을 감동시킨 줄리오 레곤디(Giulio Regondi, 1822-1872)는 따로 소개  필요없는 인물입니다, 기타음악에 친숙한 사람에게는요. 그는 8세 때 프랑스의 리용에서 데뷔했으며 그 해 4월 파리로 무대를 옮겨 이미 한 사람의 연주가로서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듬해 인 1831년 런던으로 가게 됩니다.』 [ 註 : 줄리오 레곤디의 출생년도가 1824년이라는 주장도 있음.]

중년 사내는 이어서, 1831년 「하모니콘(Harmonicon)」이라는 엄청 케케묵은 잡지에 게재되었다는 레곤디에 대한 글,「딜레탕트의 일기」라는 제목의 기사를 인용했다.
「오늘날 음악계에 있어 경이 로운 일은 줄리오 레곤디(Giulio Regondi)이다. 스페인 기타를 연주하는 이 소년은 전문가들까지도 놀라게 하고 기쁘게 한다. 이 흥미로운 천재 소년~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지만~은 리용에서 태어났으며, 겨우 8살밖에 되지 않은 소년이다. 그의 어머니는 독일 사람이며, 그의 아버지는 이탈리아 사람이다. 단지 그가 어려운 부분을 정확하고 깨끗하게 연주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를 정당하 게 평가한 것이 아니다. 그는 리듬과 선율을 정확히 연주할 뿐 아니라, 어른들도 부러워하는 표현력과 깊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 그는 레곤디의 음악에 대하여 좀더 이야기 했으나, 지윤의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중년사내는 다시 세하 주법으로 화제를 되돌렸다. 『현 시대에도 나이 어린 신동 기타리스트들이 드물지 않게 출현하고 있긴 하지만, 피아노나 바이얼린에 비해서는 그 수가 많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기존의 기타 교육체계에는 유감스럽게도 아직 세하 주법에 대한 어떤 과학적인 또는 체계적인 교수법도 준비되어 있지 못합니다. 그것이 어쩌면 그 이유 중의 하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노하우(know-how)가 없이 힘으로 해결하려 든다면 세하 주법 이야말로 나이 어린 학습자에게는 아예 극복이 불가능한 장애일 수 밖에 없으니까요. 어쨌거나, 이제 겨우 초등학교에 입학할 정도의 나이 어린 기타리스트가 출현한다는 사실은 세하 주법이 결코 힘에 의존하는 운지법이 아니라는 사실을 뒷받침해주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아닐 수 없죠.』
사실, 레곤디에 대한 이야기는 세하 주법에 대한 지윤의 고정관념을 뿌리째 뒤흔들어 놓았다.「여덟 살짜리 아이의 손가락 힘이 어찌 어른의 그것과 비교될 수 있으리.」 『이제, 세하 주법 역시 심오하고도 다양한 내용의 테크닉이 그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운지법이라는 사실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코 힘이 그 관건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할까요. 테크닉이 미비한 상태에서 힘에 의해 우격다짐으로 세하를 하려다 불가항력적인 고통과 좌절을 맛본 경험으로 인해 대 개의 학습자들은 세하 주법에 관한 한 힘이 그 필요충분 조건이라 고 미리 단정지어 버리는 경향이 있어요. 이러한 고정관념은 정교 하고도 오묘한 세하 기법의 세계로 통하는 문을 열어 볼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막아버립니다.』 지윤은 그의 말이 구구절절 옳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 었다. 그의 말투에는 약간 어눌한 듯한 면이 없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대로 설득력은 있는 편이었다. 하지만, 이야기가 왠지 자꾸 겉도는 느낌이어서 지윤은 조바심이 났다. 지윤이 말했다.

『그렇다면 분명 세하 주법이란 힘을 기른다고 해서 해결될 성격의 것이 아니겠군요. 여덟 살짜리 아이조차도 세하 주법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할 수 있는 그 근본 원리가 정말 궁금해지는데요.』 『간단히 요약한다면, 고도의 능동적인 이완(弛緩 relax)과 정교한 테크닉이 그 관건이라 할 수 있어요. 「능동적인 이완」에 대해서는 이미 약간은 맛보셨을 것이나 그 기법을 보다 깊이 있고 정교 하게 다듬어 나가야 할 것이며, 「정교한 테크닉」에 대해서는 이제부터 하나씩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중년사내의 두리뭉실한 대답은 지윤의 조바심을 되려 더 부채질 했다. 지윤은 이럴 때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았다. 아무래도 이야기의 방향을 다시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중년사내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며 지윤이 말했다. 『선생님께서 아까 저에게 물으신 것이, 무엇인가 말씀하실 것을 내심 정해 놓으시고 하문(下問)하신듯 싶은데요. 「세하를 할 때, 손가락의 어떤 부위를 사용하는 것인지... 구체적으로 손가락의 어떤 부분을 강화하고 단련해야 세하를 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일까? 」라고 물으신 것 말예요.』 중년사내의 표정이 미소와 함께 밝아진 것은 아마 이심전심(以心 傳心)의 반응이었을 터였다.
 
 

너희가 정녕 세하를 아느냐

 
『정교한 세하 기법을 익히기 위해서는 먼저, 세하를 할 때 사용 되는 손가락의 해부학적인 부위들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가 필요해 요.』 백지에다 그림을 그려가며 그가 설명했다.

그림5. 큰세하 단면도

 
『이야기가 쉬워지도록 우선, 1번손가락으로 여섯 선을 다 누르는 큰세하를 할 때 손가락 마디별로 누르는 선에 대하여 알아 보도록 합시다. 그림5에서 보듯이 대개 ④~⑥번선은 손가락 셋째마디로 누르고, 다음 ②~③번선은 둘째마디 그리고 나머지 ①번선은 첫째마디로 각기 누르게 됩니다. 이때 기타선(④, ②번선)이 손가락 마디선을 지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손가락 제3관절의 마디선이 ③번선과 ④번선 사이에 놓이게 하는 것이 가능하며 그런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그런데 기타선의 간격이 포지션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손가락 길이가 짧은 연주자의 경우, 제7포지션 이상의 상위 포지션에서는 이를 지키기가 여의치 않을 수도 있으며, 제9포지션 정도에 이르면 경우에 따라 ⑤~⑥번선은 셋째마디, ③~④번선은 둘째마디, ①~②번 선은 첫째 마디로 짚는 것이 바람직할 수도 있습니다.
이는 다소 예외적인 경우라 해야 할 것입니다만, 아무튼 각자의 신체조건이나 상황에 따라 적절히 융통성을 가져야 할 문제라 하겠습니다.』 중년사내의 지시에 따라, 지윤은 1번손가락으로 큰세하를 한 채 잠시 동안 지판을 지그시 눌러서 손가락의 손바닥쪽 면(掌側面)에 기타선 자국이 남도록 한 다음, 그 패인 자국을 보고 중년사내가 설명한 바를 확인했다. 그것을 보고 중년사내는 만족스런 표정을 지으며 설명을 계속해 나갔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사실은, 세하를 할 때 손가락의 각 마디는 각기 해부학적으로 성격이 다른 생체조직을 사용하여 선을 누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손가락 셋째마디는 탄력이 풍부한 살집 자체로 선을 누르며, 둘째마디와 첫째마디는 주로 힘 줄(腱 tendon)의 장력을 이용하여 선을 누르게 됩니다. 즉, 둘째마디는 심지굴근(深指屈筋 flexor digitorum profundus)의 건(腱 : 힘줄)에 의한 장력을, 그리고 첫째마디는 천지굴근(淺指屈筋 flexor digitorum superficialis)의 건(腱)에다 심지굴근의 건을 합친 장력을 이용하게 됩니다. 내 이야기가 좀 어렵게 들리죠?』 아닌게 아니라 지윤은 황당하고 난감했다. 좀 어렵게 들리는 정도가 아니었다. 숫째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이야기가 이런 식으로 계속되어 나간다면...」하고 생각하자 암울한 느낌이 엄습했다. 그러한 낌새를 알아채고 중년사내가 소리내어 웃으며 그녀를 안심시키려 애썼다.
『허허허! 설명을 다 듣고 나면 그리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 당장에는 생소한 해부학 용어들을 접하게 되어 당황러울 수밖에 없겠지만요. 이해가 되지 않는 용어들  일단 선반 위에 올려두도록 해요. 이야기가 진척되어 가면서 하나씩 이해할 수 있게 될 테니까요. 지레 겁먹을 것은 없어요.』
그는 책장에서 인체 해부도가 수록되어 있는 책을 몇 권 가지고 와서 펼쳐 보이면서 이야기를 계속해 나갔다. 『그림6을 보면, 손가락 뼈의 기타선에 닿는 면(掌側面)이 움푹 패여 들어간 요면(凹面)을 이루고 있어서 그 자체로는 세하를 하는 데 있어서 그리 도움이 되는 형태가 못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림6. 1번손가락 뼈의 요철(凹凸)

 
과연 그랬다. 살을 발라내고 뼈만 남겨 찍은 해부 사진이 그러한 사실을 잘 말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손가락에는 힘줄(腱)들이 지나고 있는데, 힘줄이란 팽팽하게 당겨지면 뼈처럼 단단해지거든요. 발뒤축을 지나는 아킬레스건이야 누구나 알고 있는 존재이니 힘을 주었을 때 힘줄이 얼마나 단단해질 수 있는지 쉽게 확인해 볼 수 있거니와, 손목을 약간 굴곡시키고 힘을 주면 그곳을 지나는 굴근(屈筋)의 힘줄(腱)들을 역시 어렵지 않게 만져서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그림7).
 

그림7

 
이들은 힘을 빼고 만져 보면 고무줄처럼 부드러우나 힘을 주면 마치 뼈를 만지는 듯한 느낌이 들 겁니다. 손가락의 손바닥쪽 면(掌側面)에는 심지굴근(深指屈筋 flexor digitorum profundus)의 건(腱)과 천지 굴근(淺指屈筋 flexor digitorum superficialis)의 건이 지나는데 이들 역시 여늬 힘줄과 마찬가지의 특성을 가지고 있어요(그림8). 』

그림8. 심지굴근의 건과 천지굴근의 건

 
『심지굴근의 건(腱)은 팔에서부터 뻗쳐 내려와 손가락 셋째마디뼈(末節骨)에 부착하므로 세하 주법에 있어서 주로 이 건이 지나는 손가락 둘째마디와 첫째마디로 선을 누르는 데 도움이 되며, 천지굴근의 건은 팔에서부터 뻗쳐 내려와 손가락 둘째마디뼈(中節骨)에 부착하므로 주로 이 건이 지나는 첫째마디로 선을 누르는 데 도움이 됩니다(그림8, 그림9). 집게손가락과 엄지손가락을 둥근고리 모양이 되도록 맞닿게 하고 힘을 주면서 주의를 기울여 만져보면 이들 역시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만일 확인이 어려우면, 맞닿은 양 손가락(집게와 엄지)에 힘을 주었다뺐다 반복하면서 만져봄으로써 힘줄의 탄력 변화를 감지하는 방법으로 확인하면 됩니다.』

그림9. 심지굴근(深指屈筋)과 천지굴근(淺指屈筋)

 
지윤은 손가락 마디뼈를 지나고 있는 힘줄 또한 힘을 주면 뼈와 구별이 힘들 정도로 단단해지는 것을 확인했다. 그런데 손가락을 굴곡시킨 상태에서는 어렵지 않게 감지되었으나 손가락을 곧게 펴서 세하 자세를 취한 상태에서는 여의치 않았다. 그러나 중년사내의 조언에 따라,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뺐다 하면서 세심하게 살피자 어렵사리 그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해부학 관련 용어들이야 생소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림6과 그림8을 살펴 보니 뭔가 알 것 같기도 했다. 손가락 마디뼈들의 생겨먹은 꼬락서니가 그림6과 같대서야 그 자체만으로는 분명 세하에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 그림8과 그림9를 보면 손가락 첫째마디뼈 위로는 심지굴근의 건과 천지굴건의 건이 지나고 있으며, 손가락 둘째마디뼈 위로는 심지굴 근의 건이 지나고 있다. 그런데 심지굴근의 건이, 천지굴근의 건이 갈라져 만들어진 틈새로 통과하고 있는 모양이 재미있게 생각되었다.
중년사내의 설명이 계속되었다. 『테크닉이 미숙한 초보 학습자가 큰세하를 할 때 주의깊게 살펴 보면, 손가락 제3관절의 마디선에 ④번선이 지나도록 짚은 탓에 ④번선의 소리가 잘 나오지 않는 현상을 더러 관찰하게 됩니다(그림 10). ④번선의 굵기가 인접한 ③,⑤번선에 비해 가늘기 때문에 손가락마디선과 ④번선이 일치하게 되면 매우 치명적인 결과를 낳게― 손가락 제3관절의 마디선에 ④번선이 지나는 경우 됩니다(이 경우, ②번선 역시 제2관절의 마디선을 지날 위험이 다분합니다).

그림10. 잘못된 큰세하
 

그러므로 3관절 마디선이 ③번선과 ④번선 사이를 지 나도록 유의해서 짚어야 합니다(그림5). 다시 말해서, 큰세하를 할 때 1번손가락의 끝이 ⑥번선 위로 너무 벗어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 점만 주의한다면 누구든 손가락 셋째마디로 선을 누르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습니다. 손가락 셋째마디는 탄력이 풍부한 살집으로 덮혀 있는 탓에 별도의 배려가 필요하지 않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손가락 둘째마디나 첫째마디, 그중에서도 특히 둘째마디로 누르는 선의 음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서 곤란을 겪는 경우는 누구나 경험하게 됩니다. 손가락 첫째마디는 두 개의 힘줄(腱)이 지나므로 상대적으로 둘째마디보다는 유리할 뿐만 아니라, 차후에 다시 설명하게 되겠지만, 그 위치가 지레점에 가깝기도 해서 선의 장력에 대항하기가 유리한 측면도 있습니 다. 해서, 어려움이 덜하지요.』 말을 마치자 그는 다음과 같은 악보를 그려 보였다(악보10).

악보10. G (major chord)와 Gm (minor chord)

 
『악보10은 C(다)장조의 딸림화음에 해당하는 G코드(G major chord)와 G 코드의 제3음(시B)을 반음 내려 단3화음으로 만든 Gm코드(G minor chord)입니다. 그런데, 학습자들은 G코드에 비해 Gm코드를 힘들어 합니다. G코드와 Gm코드의 차이점이라면 제3음(시B ↔ 시b Bb)의 차이밖에 없지요. 이 제3음 시(B) 또는 시b(Bb)은 ③번선에 위치하며, ③번선은 기타선 중에서 가장 굵은 ⑥번선에 버금가는 굵기를 가지고 있습니다(그림11). 그러나 장력(張力)은 여섯 선 중에서 가장 약합니다. 그러므로 Gm 코드를 짚을 때 이 음(시b Bb)을 담당하는 손가락 둘째마디에 별다른 문제가 없다면~즉, 다시 말해서 손가락 마디뼈의 손바닥쪽면(掌側面)이 요철(凹凸)없이 평탄하다면 여섯 선 중에서 이 선이 가장 누르기 쉬워야 하며 따라서 Gm 코드가 G 코드보다 특별히 짚기 어려울 하등의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그림11. 기타선의 굵기 비교

 
악보10에서 예든 두 코드는 기타 코드 형태(chord form) 중에서 도 가장 많이 사용되는 유형의 하나다. 이 코드를 제1포지션에서 짚으면 F(Fm)코드가 되며 5포지션에서는 A(Am)코드가 된다. 지윤 역시 이 코드의 단3화음 형(minor chord form)을 짚기가 매우 까다롭다고 생각해 오던 터이었다. 장3화음 형태와의 외견상의 차이점이라고는 ③번선을 하나 더 세하로 눌러야 한다는 것밖에 없는데 비해 코드를 누르는 전체적 힘은 두 배 세 배 더 들었다. 중년 사내의 다음 말은 듣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손가락 둘째마디를 지나는 힘줄(심지굴근의 건), 그것이 이 문제의 핵심인 것이다. 『언뜻, 이유없이 어려워 보이는 이러한 코드의 운지를 원인 규명이 없이 막연히 힘으로 해결하려 들면 어찌 될까요?』
그가 보다 현실적인 문제에 초점을 맞추었다.
『선생님께서 왜 힘줄(腱)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것인지 이제 알 것 같군요. 아니, 알 것 같은 정도가 아니라 문제의 핵심에 머리를 「쾅!」하고 부딪힌 느낌이예요.』 사실 중년사내의 이야기는 다소 충격적이었다. 지윤은 그의 남다른 통찰력에 대하여 약간의 놀라움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꼈다. 그는 해박한 해부학적 지식을 토대로 연주 이론의 한 분야를 서두르 지 않고 차근차근 규명해 나가고 있었다.

『이러한 어려움에 부딪힐 때마다 학습자들은 십중 팔구 그 이유를 생각해 보기도 전에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들게 됩니다. 그리하여 무모하게 힘만 소진하게 되고 그 결과 무리(無理)가 무리(無理)를 낳는 무리(無理)에 직면하게 됩니다. 일단 한 번 시작된 무리한 운지는 좀체 거두어 들일 수 없는 빈곤의 악순환을 낳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학습자는 세하 주법이란 손가락 힘이 그 관건이라고 생각하게 되고 그러한 생각은 그대로 고정관념이 되어 굳어져 버립니다. 여기서부터 세하를 기피하는 증세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중년사내의 시각은 자못 예리하고 치밀한 데가 있었다. 지윤은 지금 그에게 묻고 싶은 것을 더 이상 미적거리면서 망서리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는 그녀의 질문을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이 경우 손가락 둘째마디를 지나는 심지굴근의 건(腱)을 무리없이 뼈처럼 단단하게 하는 감각이 관건이겠군요? 그것도 순간적으로!. 그리할 수만 있다면 힘들이지 않고 쉽게 이 코드를 짚을 수 있겠죠? 여늬 코드처럼 말이지요. 하지만, 그러한 것이 가능하도록 훈련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신통한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는데요. 해부학이란 것이 제게는 워낙 생소한 분야이니, 하나부터 열까지 선생님의 도움이 없이는 사고(思考)의 전개가 불가능한 상태일 수밖에요. 어떤 방법으로 연습해야 하나요? 선생님.』
『물론 적절한 훈련방법이 있습니다. 하지만, 앞서 설명했듯이 각 손가락 마디의 해부학적인 재원들에 대한 이해가 선결되어야 합니다. 그 생리적인 특성과 운동 메커니즘에 대해서요. 개념이 분명해야 효과적인 연습이 이루어질 수 있으니까요.』
『해부학적인 재원이라면... 손가락 셋째마디는 탄력이 풍부한 살집을 사용하여 선을 누르고 나머지 둘째, 첫째마디는 힘줄의 장력을 이용한다고 하셨으니까, 살집과 힘줄이 되겠군요.』
『네, 그렇습니다. 그러나 아직 손가락을 지나는 힘줄의 장력과 관련된 운동 메커니즘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먼저 그에 대하여 설명해야 겠죠? 그리고 나서 악보9에 의한 세하 연습에서의 이완을 좀더 정교하게 그리고 다양한 형태로 확장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요령을 익히게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세하로 누른 음들이 제대로 소리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소리는 물론 이거니와 얼마나 이완된 상태로 편안하게 세하를 하느냐에 있으니까요. 그리고 점차적으로 세하 주법에 대한 여러가지 테크닉과 다양한 연습방법 등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물론 손가락 마디를 지나는 힘줄의 장력에 대한 감각을 기르기 위한 연습을 포함해서요. 그리하여 머잖아 세하 주법이 얼마나 편리하고 즐거운 운지법인지를 스스로 실감하게 해드려야지요. 약속은 약속이니까... 제가, 세 주법이야 말로 기타 운지법에 있어서의 마이티 카드(mighty card)라는 말을 했던가요?』
 
중년사내의 어투는 여전히 느릿했다. 마치 사고(思考)의 늪에 빠져서 혼자 중얼거리는 사람처럼. 『큰세하를 할 때, 그 구성요소인 손가락 셋째마디 둘째마디 그리고 첫째마디에는 각기 미묘한 차이가 있는 운동 메커니즘이 적용됩니다. 손가락 마디마다 사용되는 해부학적 재원이 각기 다르기 때문에 이는 당연한 이치라 하겠습니다. 그러한 차이를 구별하는 감각과 그와 같은 재원을 각기 효과적으로 운용할 적절한 테크닉을 갖추지 않고, 오로지 「선을 누른다」는 단순한 생각만으로 세하를 해서야 효과적이고 능률적인 기법을 구사하기 어렵지요. 뿐만 아닙니다. 세하는 그 형태가 매우 다양합니다. 따라서 세하의 형태에 따라서도 구사하는 기법 역시 그만큼 다양해지게 됩니다. 세하로 눌러야 하는 선의 조합에 따라 동원해야 하는 재원과 그 재원들에 대한 힘의 분배를 달리해야 하고, 운용 메커니즘 또한 각기 달리해야 합니다. 정교하고 섬세한 테크닉은 최대한의 이완을 보장해주어, 편안하고 즐거운 세하 주법이 되게 해 줍니다. 그야말로 mighty card로서의 세하 주법을 선사하는 것입니다.』 지윤은 언젠가 중년사내가 말했던 노하우(know-how)의 실체가 어쩐지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짐짓 딴청을 부려 그를 좀 성가시게 하고 싶은 심술이 났다.

『하지만 선생님, 그러한 재원들의 해부생리학적인 특성과 운동 메커니즘을 모르고서도 지금까지 많은 연주가가 세하 주법을 능숙하게 잘 구사해 왔지 않습니까? 설마, 여덟 살 소년 레곤디 (Giulio Regondi)가 그러한 지식을 가졌을 리도 만무하고...』
중년사내가 약간 곤혹스런 표정을 지어보였지만, 그것도 잠시. 곧 그의 어눌한 투의 그러나 꽤 논리정연한 말이 굴러나왔다.
『물론 그렇긴 하지요. 사람은 본능적으로 각자 주어진 환경에 적응해 나가는 능력을 가졌거든요. 세하 테크닉에 대해 체계적인 지식이 없더라도 그것을 연습해 나가는 중에 경험하게 되는 다양한 상황에 맞추어 근육과 감각이 점점 다듬어지기 마련이니까요. 물론, 상당한 시행착오도 경험하게 되겠지만. 대개는 그러한 과정이 부지불식간에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스스로 깨닫고 있지는 못할지라도 충분한 연륜에 도달한 연주자는 손가락 각 마디의 해부학적인 재원들을 그 특성에 맞게 운용하는 테크닉에 스스로 적응되어 있는 것입니다. 개중에 예민한 감각을 가진 연주자는 해부학적인 재원들 의 특성을 그 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스스로 자각·통제하는 능력을 가진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근본 이치에 대한 규명이 없이 오로지 시행착오와 본능적인 감각에만 의존하는 그와 같은 경우, 테크닉에 대한 성취도에 있어서 학습자 서로간에 큰 차이를 보이게 됩니다. 말하자면 소질이 있고 예민한 감각을 지닌 학습자는 매우 빠른 성취도를 보일 것이고 그렇지 못한 학습자는 상당한 세월 동안 많은 노력을 허비한 다음에야 바라는 바를 성취하게 될 것입니다. 또는 운이 좋지 않으면 중도에 포기하고 마는 경우도 생겨나겠지요. 그러나, 결코 간과해서는 안되는 사실은 최고의 완성도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근본 이치를 체계적으로 분석· 규명한 지식이 그 바탕에 깔려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지식을 토대로 출발하는 학습자는 재능의 열세(劣勢)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고 비교적 빠른 시간 내에 경지에 도달하는 이점 (利點)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실패하는 일 없이 말입니다.』
 
지윤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의 말이 좀더 계속되었다.
『레곤디(Giulio Regondi)에 대해서라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군요. 천부적 재능을 가진 사람은 사람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신과 대자연에 의해 교육되는 것이라고요. 가르치는 이가 있건 없건, 그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모든 피조물로부터 스스로 배워나가는』
 
중년사내의 말이 달빛 아래 고요히 이는 잔물결처럼 귓가에 밀려 왔다. 아마 그의 어눌한 말투 때문에 더욱 그렇게 들렸을 것이다. 『많은 초보 학습자들이 중급과정의 문턱에서 세하 주법에 그만 기가 꺾여버리고 마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노하우에다 적절한 노력만 더한다면 누구든 어렵지 않게 극복할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여덟 살밖에 되지 않은 소년도 잘 해낼 수 있었던 것이니까요』 이미 점심시간이 훨씬 지나고 있었기 때문에 이 날의 레슨은 여기서 끝낼 수밖에 없었다.
 
[출처] 신현수님 홈피 http://www.musicnlif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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