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삶의향기

정북창 설화

by 라폴리아 2018. 7. 5.

정렴(鄭?)

조선 13대 명종 때의 학자·관리·도인.

자는 사결, 호는 북창, 일명 용호대사라고 하였다.

 

조선 인종이 죽고 문정왕후 아들 명종이 즉위하자 정렴의 아버지 정순붕은 문정왕후 오빠 윤원형의 편이 되어 1545년 을사사화를 일으켜서 명종에게 걸림돌이 되는 100여명을 숙청하여 우의정까지 올랐다. 윤원형은 소실 난정이를 시켜 정부인을 독살하고 난정이를 정부인으로 삼고 친형도 귀양보내 죽였다. 정렴은 노산리 진주유씨 유인걸의 사위인데 이조판서 유인숙은 유인걸의 동생이므로 정렴의 처삼촌이다. 정순붕은 사돈인 이조판서 유인숙을 죽이고 재산과 노비를 빼앗았다. 그래서 정렴은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를 말렸으나 정순붕은 듣지 않고 아들인 정렴도 죽이려고 하였고 양자로 간 정렴 동생 정현도 아버지와 합세하여 정렴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래서 정렴은 세상을 탄식하며 처갓집 동네 장산(노산리)으로 피신해 은거하면서 도를 닦고 학문을 연마하다 1549년에 죽었다. 그래서 노산리에는 정렴이 살았던 북창네라는 동네가 있고 50여년 뒤에 문의현 선비들은 정렴이 문의현 장산(노산리. 양공공 산소 밑)에서 은거하다가 죽었다고 하여 노봉서원을 세우고 정렴을 배향하였다.

 

정렴은 아들 지복과 지림을 두었는데, 둘 다 아들을 낳지 못하여 지복은 사촌동생의 아들을 양자로 두었다. 지림은 딸만 낳았는데 안동 권정기에게 시집갔다. 지림의 산소는 노산리 용뱅이에 있다. 권정기는 이조판서 권극례의 아들로 노산에 살았다. 권정기의 손자가 하석리 효자각에 모셔져 있는 권회인데 후손인 하석 2리의 안동권씨들이 정지림을 외손봉사하여 세향 올려 왔다. 정지림은 벼슬을 하지 못하였는데 할아버지 정순붕이 무고하게 을사사화를 일으켰다고 하여 조정에서 자손들의 과거를 금지시켰기 때문이다.

 

 

1. 용호비결은 조선선도와 동의보감의 바탕

 

정렴이 어려서 중국에 갔을 때 봉천전에서 만난 중국 도사가 조선의 선도를 깔보자, “우리 나라는 삼신산이 모두 있어서 낮에도 도사가 승천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장생불사하기도 하는데 이런 일은 우리나라에서는 늘상 있는 일이라 신기한 일이 아니다” 말하였다. 그러자 중국도사가 놀라면서

“그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자 정렴이 황정경과 음부경을 꺼내서 옷을 가르키니 기운이 불타는 모양으로 차례차례 하늘로 올라갔다. 그러자 중국도사는 공손히 물러갔다.

 

용호비결은 정렴이 어려운 중국 도서에 의존하여 공부하지 않도록 조선선도를 새롭고 쉽게 쓴 책이다. 용호비결은 가장 오래되고 최초인 선도 책이면서 중국 이외의 지역에서 처음 쓰여진 책으로 선도 수행자들의 기본 교재가 되었다. 그리고 용호비결의 조선 의학사상은 허준의 동의보감 원리에 큰 영향을 미쳤다. 동의보감은 정렴의 막내 동생 고옥 정작도 참여하여 양생술 이론을 제공하였다.

 

정렴은 고질병 있는 사람들을 많이 고쳤다. 정렴이 말하기를

“의란 사람 뜻에 달려 있는 것이니 마땅히 음양과 춥고 더움을 살펴서 증세에 따라 약을 써야 하는데 의사라는 사람들이 진편(옛날부터 내려오는 처방)에만 매달려서 생각이 편협하여 변통을 알지 못하여 오히려 증상을 거역하는 처방을 하여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라고 하였다.

 

아무리 좋은 약과 방법을 써도 낫지 않던 고질병환자를 보고 정렴은 띠풀 한 줌을 갈아 볕에 말려서 복용시키자 그 사람은 병이 나았다고 한다.

정렴의 의술은 널리 알려져서 어의로 인종도 진맥하였다.

 

 

2. 단학 창시

 

정렴은 몸이 허약하여 몸을 튼튼하게 하기 위하여 단전호흡법인 단학을 만들었는데 단학을 수련하는 사람들은 정렴이 지은 용호비결(북창비결)을 교과서로 하고 있다.

 

어느 날 정렴이 집에서 연단을 하며 화후지법을 익히고 있을 때 손님이 찾아왔다. 손님은 몸이 찬 사람인데다 추운 겨울이라 추위까지 더하여 고통을 참을 수 없었다. 그러자 정렴은 창고에서 철편을 꺼내 겨드랑이에 끼고 연단을 하여 따뜻하게 하여 손님에게 주었다. 손님은 철편을 겨드랑이에 끼웠는데 철편은 난로와 같이 뜨거워서 땀을 비오듯 흘렀다.

 

 

3. 신의 능력을 지닌 정렴

 

정렴은 나면서 글을 알고, 대낮에도 그림자가 없고 어릴 때부터 신과 통하고, 가까이는 동리 집안의 사소한 일부터 멀리 사이팔만 밖 바람 소리와 개소리ㆍ새소리까지 귀신처럼 잘 알고, 모든 술법을 알았다.

장유가 정렴을 위해 지은 글에 “한 번 산에 들어가 며칠 동안 마음을 가다듬고 수양한 다음 내려올 때면 산 아래 100리 간에 일어난 일을 자기 눈으로 직접 본 것처럼 훤히 알아 맞혔다.”고 하였다. 성수익은 정렴은 풍모부터 다른 신인이라고 하였다.

 

정렴은 총명하여 한두 번 글을 읽으면 모두 외었고, 자라서는 천문ㆍ지리ㆍ음악ㆍ의약ㆍ복서ㆍ산수ㆍ한어에 달통하여 배우지 않고도 잘 하였다. 그래서 어렸을 때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 가서 중국인과 통역 없이 말을 하자 모두 놀라며 “천하의 기이한 재주다.” 하였다.

정렴의 신기는 세 살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특히 소리로 표현하는 음률, 병든 자의 생과 사를 좌우하는 의약, 천기를 내다볼 수 있는 천문지리, 복서술등에 심취하여 이십여 세에 이미 학문이 최고에 이르렀다. 그래서 그림자 없는 귀신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4.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예언

 

정감록으로 알려진 정렴이 지은 ‘북창비결’에서는 말세가 되면 ‘서남쪽의 독이 궁궐에까지 미칠 것”이라고 했는데 제주도와 전라남도에서 일어난 동학란과 이재수의 난을 예언한 것이다.

그리고 ‘쥐의 아비 시체가 온 나라에 누워 있고, 뱀의 형 집 연기가 천리 밖에서 날 것이다.’라고 한 것은 쥐의 해 일년 전 용해에 일어난 임진왜란과, 쥐의 해 병자호란을 예언한 것이다.

환란이 닥치면 ‘여덟 줄의 백성이 다섯 달 동안 시체로 쌓일 것인데 그 때 소나무와 잣나무를 심을 것이요, 제비와 기러기가 오고가는 시절이다.’하였는데 ‘소나무와 잣나무’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군을 이끌고 온 이여송과 이여백 형제를 말하고 ‘제비와 기러기가 가고 오는’ 것은 병자호란 이후 포로와 사신들의 연행길(중국길)이 잦아진다는 예언인데 모두 맞았다.

 

 

5. 다른 나라 말을 배우지 않고도 유창

 

정렴은 열네 살 때 사신인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 가서 중국말을 배우지 않았는데도 중국 사람들과 거침없이 대화를 하였다. 또한 유구국(오끼나와) 사신이 찾아오자 유구국 말로 대화를 하니 유구 사신은 정렴을 보자 놀라서 절을 하고 말하였다.

 

"고국에서 점을 치니 진인을 만날 것이라고 했는데 당신이 그 분이오.”

 

라고 하였다. 예로부터 '진인은 그림자가 없다.'고 하였는데 정렴은 그림자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구 사신은 정렴에게 간청하여 주역을 배웠다. 이때 소문을 듣고 각국 사신들이 찾아와서 정렴에게 말을 걸었는데 정렴이 각나라 말로 각각 응대하자 모두 경탄하고 천인이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이 정렴에게, “새와 짐승의 소리를 알아듣는 이가 있듯, 다른 나라의 말소리도 알아듣는 일은 있을 수 있지만 말까지 할 수 있다는 것은 이상하오.” 하자 정렴은 “나는 듣는 것뿐 아니라 말도 할 수 있게 된지 오래요.”라고 하였다.

 

 

6. 앉아서 200리 밖의 일을 아는 정렴

 

정렴은 산에 들어가 선가의 육통법을 연마하여 사흘 만에 산 아래 백 리 바깥의 일을 앉아서 아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래서 산에 있을 때 산 밑에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아무개 집에서는 지금 무슨 일을 한다.” 하여 사람들이 확인해 보면 그 말이 맞았다.

 

어느 날 정렴네 집에서 종을 시골로 심부름 보냈는데 돌아올 때가 지났는데도 오지 않자 정렴에게 어찌된 일인지 알아보라고 했다. 정렴이 잠시 생각하더니 말하였다.

 

“그 녀석이 고개를 넘어오다가 양반 행차에 불경하여 붙들려서 맞고 있는 중이요.”

 

종이 돌아오자 집안 사람들이 사실인가 확인하였더니 종이 “맞습니다.” 하였다. 온 집안사람들은 탄복하였다.

 

정렴이 14살 때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 가서 신통한 능력을 보이자 술법을 잘 하며 객관에서 품팔이로 땔 나무를 나르는 사람이 말하였다.

 

“선생은 만물에 신통한데 도덕경에 ‘문을 나가지 않고도 천하의 일을 다 안다.’고 한 말이 선생을 이르는 말인가 합니다.”

 

 

7. 동생이 후손을 이을 것을 예언

 

정렴은 6형제 중 장남이었는데 셋째 동생인 정첨 부인인 제수 구씨를 유별나게 존중하였다. 사람들이 이유를 물었다.

 

“우리 집안은 모두 제수씨의 자손이 될 것인데 어찌 존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정렴 말대로 형제들은 정첨 외에는 자손을 두지 못하여 모두 정첨의 아들을 양자로 들여서 대를 이었다.

 

 

8. 소주잔이 커질 것을 예언

 

판서 홍성민은 어렸을 때 정렴과 함께 술을 마셨는데 그 때 사기로 만든 소주잔은 규정에 따라 매우 작게 만들어져 있었다. 정렴이 홍성민에게 잔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것은 작은 잔에 불과하지만 점점 커져서 큰 종이 될 것인데 나는 자네가 대비하는 것을 보지 못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 후 세상이 소주마시는 것을 숭상하게 되어 소주잔이 커져서 큰 종을 사용하게 되어 작은 사기 소주잔은 아예 만들지 않게 되었다.

 

 

9. 수중 명당

 

정렴의 삼촌이 죽자 아들인 사촌이 아버지 묘자리를 부탁하였다. 정렴이 사양하다가 정해주기는 하였으나 묘자리에 물이 나왔다. 그래서 묘를 쓰지 않으려고 하였으나 정렴은 거기에 묘를 쓰라고 고집하였다.

 

그러면서 정렴이 큰 돌을 몇 개 채워 넣고 좋다고 산소를 쓰라고 하자 억지로 장례를 마쳤는데 내키지 않은 사촌집 사람들의 원망이 컸다. 그러나 후손들은 산소 안에 채워 넣은 돌의 수만큼 자손들이 문과에 급제했다. 이것은 수중명당으로 무덤 안에 넣은 돌의 수만큼 후손들이 출세를 하는 대혈이었던 것이다.

 

 

10. 구렁이의 복수

 

정렴은 조카들이나 다른 아이들은 귀여워하면서도 자기 자식들을 귀여워하지 않아서 아내의 불평이 심했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식들이 울면서 갑자기 모두 죽어버렸다. 부인과 사람들이 살펴보았더니 그것은 커다란 구렁이들이었다. 정렴은 결혼 전에 길을 가다 우연히 구렁이를 죽인 적이 있는데 그 구렁이가 복수하려고 자식들로 둔갑하여 태어났다. 정렴은 이런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아이들을 귀여워하지 않았고 스스로 정체를 나타내서 죽도록 수를 써 놓은 것이다.

 

정렴은 자손이 아들 대에서 끊겼다. 그래서 이런 전설이 생겼는데,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려고 한 것에 대하여 비통해 하며 가족의 의미를 상실하여 스스로 대가 끊기도록 하였다고 한다.

 

 

11. 수명 연장

 

정렴의 친한 친구(정승을 지낸 윤두수)가 병에 걸려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는데 백약이 무효였다. 그의 아버지는 정렴이 신통하다는 것을 알고 정렴을 찾아와 울면서 물었다.

“여보게, 내 아들이 얼마나 더 살 수 있겠는가?”

“명이 다하여 40살을 넘길 수 없습니다.”

친구 아버지는 정렴의 손을 잡고 울면서 매달렸다.

“여보게, 자네라면 무슨 방법이 있을 것이 아닌가. 제발 내 아들을 살려 주게.”

정렴이 친구 아버지를 측은하게 바라보며 한참 생각하다가 말하였다.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려면 제 수명에서 10년을 떼어 주어야 합니다.”

“그래도 괜찮겠는가? 방법을 알려 주게.”

“제가 시키는 대로 하십시오. 밤 삼경에 남산에 올라가면 검은 옷을 입은 스님과 빨간 옷을 입은 스님이 있을 터인데, 아드님 수명을 연장하여 달라고 애원하면 화를 내며 쫓아낼 것인데 물러나면 안 되고 지팡이로 쳐도 피하지 말고 맞으면서 천만번 빌고 또 비십시오. 그러면 될 것입니다.”

 

친구 아버지는 정렴이 시키는 대로 밤에 남산 꼭대기에 올라가자 정렴 얘기대로 스님 둘이 있자 시킨 대로 울면서 사정을 하였다. 그러자

“지나는 길에 잠시 쉬는 틈인데 누가 알고 이런 일을 시켰는가? 어쨌건 그대의 아들은 수명이 그 뿐이므로 어떻게 할 도리가 없으니 돌아가게.”

 

그러나 물러나지 않고 바짓가랑이를 잡고 계속 애원하자 스님이 지팡이로 치면서 떨어지라고 하였으나 죽기를 각오하고 매달리며 애원하였다. 한참을 때려도 물러나는 기색이 없자. 검은 옷을 입은 스님이 빨간옷을 입은 스님을 보고 말하였다.

“이것은 필시 정렴이 시켜서 한 일이라 괘씸하지만 이 자의 정성이 지극하므로 정렴의 수명을 10년 줄여서 이 자의 아들에게 주면 어떨까.”

그러면 될 것이네.”

검은옷을 입은 스님이 소매에서 책을 꺼내어 빨간옷을 입은 스님에게 주자 빨간 옷을 입은 스님은 달빛에 붓으로 수명을 고쳐 적고 말하였다.

“그대의 아들은 지금부터 10년을 더 살 것이니 돌아가되 정렴에게 다시는 천기를 누설하지 말라고 전하라.”

하며 두 스님은 홀연히 사라졌다.

검은 옷을 입은 남두육성의 정기이고 빨간옷을 입은 스님은 북두칠성의 정기였다.

정렴은 천기를 누설한 죄로 44살까지 밖에 살지 못하였다.

 

 

12. 새와 짐승의 말을 알아들음

 

정렴은 새와 짐승이 하는 소리를 알아듣고 산 아래 사람이 하는 일을 알고 “그 집에서 무슨 일을 한다.” 하면 맞았는데 선도의 도술이다.

 

정렴이 잔칫집에 갔는데 새들이 그 집 술은 무덤가에서 거둔 밀로 빚었다고 지저귀었다. 정렴이 그 얘기를 하자 원님은 사람을 미혹시킨다고 정렴을 잡아갔는데 새가 원님이 사생아라는 것을 알려 주자 정렴이 귓속말로

“새가 원님이 사생아라고 하는데 사람들 앞에서 말씀드릴까요?”

원님은 그 사실이 알려질까 염려하여 정렴을 풀어주었다.

정렴이 산을 지나는데 까마귀가 ‘대육대육(大肉大肉)’하며 모여들었다. 정렴이 듣자니

“사람 시체를 먹자는 소리인데, 사람이 이런 데서 까마귀밥이 되면 오죽 비통하겠나. 훠이 훠이.”

정렴은 까마귀를 쫓으면서 보니 칼에 찔려 죽은 사람이 있었다. 그때 사람들이 몰려오면서 시끄러워졌다.

“여기 사람이 죽어 있는데 저 사람 밖에 없으니 저자가 죽인 것이 분명하다.”

정렴은 살인 누명으로 끌려갔다. 정렴이 판관에게 말하였다.

“저는 새가 하는 소리를 알아듣는 능력이 있어서 까마귀 소리를 듣고 죽은 사람을 묻어 주기 위하여 간 것이지 제가 죽인 것이 아닙니다.”

“그럼 네가 어떻게 새소리를 알아듣는지 증명을 해 보거라.”

판관은 정렴을 죽이려고 제비를 잡아와서 제비가 무엇이라고 하는지 물었다.

“어미 제비가 판관이 잡은 새끼 제비를 살려 달라고 하면서 ‘피불용 육불용 골불용(皮不用 肉不用 骨不用 가죽도 못 쓰고, 고기도 못 먹고, 뼈도 못 쓰고)’이라고 하며 쓸모도 없으니 얼른 돌려달라고 우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판관은 감탄하면서 정렴을 살려 주었다.

 

 

13. 휘파람

 

정렴은 음률에 조예가 깊어서 휘파람도 아주 잘 불었다.

휘파람은 선도를 오래 하여 깊은 내단의 공력이 있어야 낼 수 있는데 중국은 위진 때의 선인 손등이 휘파람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

 

정렴은 아버지 정순붕이 강원감사 시절 금강산에 놀러갔는데 갑자기 계곡을 진동하는 큰 휘파람 소리가 들려서 시중들던 절의 중들이 놀라 용의 울음소리인가 여겼는데 정렴이 불어댄 휘파람소리였다고 한다. 북창집에서는 정렴이 금강산 꼭대기에서 휘파람을 불었더니 온 산이 울려서 중이 피리 소리로 알았다가 뒤에 정렴이 부는 휘파람인 것을 알았다고 한다.

 

 

14. 불의 정기를 가진 아이

 

어떤 사람이 손자를 낳았다. 정렴이 그 아이를 보자 불의 정기였다.

“여보시오 이 아이를 빨리 강물에 던지시오.”

“무슨 소리요? 남의 아이를 물에 던지라니.”

“이 아이는 불의 정기이므로 주변이 모두 다 타버리게 되오.”

“네 이놈 무슨 헛소리로 남의 아이를 물에 던져 죽이라고 하느냐? 어?”

그 사람은 아이가 갑자기 뜨거워지기 시작하여 안고 있을 수가 없자 반신반의하면서 아기를 강물에 던졌다. 그러자 강물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15. 죽을 날을 안 정렴

 

정렴은 44세가 되자 죽을 때인 것을 알고 주변사람에게 죽을 날짜를 말하고 자기 만사를 다음과 같이 스스로 지었다.

 

一生讀破萬卷書 (일생독파만권서) 평생 만 권의 책을 일고

一日飮盡天鍾酒 (일일음진천종주) 하루에 천 잔 술을 마셨노라

高談伏羲以上事 (고담복희이상사) 복희씨 이전 일을 고고하게 담론하고

俗說往來不掛口 (속설왕래부괘구) 속된 얘기는 입에 담지 않았네

顔子三十稱亞聖 (안자삼십칭아성) 안자는 삼십에 죽었어도 아성이라 불리웠는데

先生之壽何其久 (선생지수하기구) 선생의 삶은 어찌 그리 길더뇨?

 

그가 조용히 앉아서 좌화하자 구름을 타고 승천하였다는 백일비승의 얘기가 있다.

 

 

16. 효자 정렴

 

정렴의 아버지 정순붕은 불의하였고 정렴은 아버지에게 버림받았으나 정렴은 효심이 깊었다. 정렴은 동네에 애경사가 있으면 가장 먼저 가서 자리 잡고 앉았다. 정렴 아버지는 을사사화를 일으켜서 무고한 사람을 많이 죽이고 음해하여서 사람들이 모이기만 하면 “고약한 놈, 나쁜 놈”하며 욕을 했기 때문이다. 정렴은 학식과 명성이 높아서 자신이 앉아 있으면 사람들이 아버지에 대한 험담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가장 먼저 가서 앉아 있다가 가장 나중에 일어나곤 하였다.

 

 

17. 검단사 설경(黔丹寺 雪景)

 

山逕無人鳥不回 산길에 사람 없고 새도 날지 않는데

孤村暗淡冷雲堆 외로운 마을 어둑어둑 차가운 구름 쌓이네

院僧踏破琉璃界 산사의 스님 유리판 같은 길따라

江上敲氷汲水來 강으로 나가 얼음 깨고 물 길어 돌아오네

 

정렴이 살던 현도면 노산리 북창네 서쪽 뒷산을 검단산이라고 하고, 검단산 옆을 흐르는 깊은 금강 물을 검단이(수영장 자리)라고 한다. 노산리 뒤에는 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절터에 새 절이 지어져 있다. 데 정렴은 이곳에 살면서 검단산의 절과 형각강(금강)을 읊은 것이다.

 

 

18. 정렴 묘갈

 

부군은 이름이 렴이요, 자는 사결이며 성은 정씨로서 본관은 온양이고, 호는 북창이다. 시조는 이름이 보천인데 고려 시대 벼슬이 호부 상서였고 시호는 정신이다. 아조(조선)에 들어와서는 득량이란 분이 있어 판선공감사를 지냈고, 이 분이 포를 낳으니 고성 군사였다. 이분께서 충기를 낳으니 교리였고, 또 이분이 탁을 낳으니 헌납이었고, 이 분이 순붕을 낳으니 돌아가셨을 때의 벼슬이 우의정이었다. 이분께서 완산 이씨 양녕대군 제의 증손 봉양 도정 종남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하여 정덕 병인년(1506, 중종 원년) 3월 갑신일에 부군을 출생하였다. 부군께서는 정유년(1537, 중종 32)에 진사에 합격하시고 가정 기유년(1549, 명종 4) 7월 16일에 돌아가시니 양주 사정리 의정공의 묘소 아래에서 몇 보 떨어진 북쪽을 등진 언덕에 묘소를 정하였다.

부인은 진주 유씨로서 우찬성으로 증직된 문통의 손녀이며 학생 인걸의 딸인데 돌아가신 날은 7월 12일이라고 전한다.

 

『동국명신록』에 보면 “공은 음율에 정통하였고 더욱 천문과 의약에도 탁월하여 조정에서는 장악원 주부로 추천하여 관상감과 혜민서의 교수를 겸직하도록 하였다. 포천 현감으로 나갔다가 오래지 않아 벼슬을 그만두고 양주의 괘라리에 돌아와서 병을 요양하였다”고 한다. 또 이르기를 “공은 허심탄회하고 고명하여 선천적으로 빼어난 재주를 타고난 듯하였다. 성학으로서 주장을 삼고 이를 마음의 근본으로 삼아 항상 이르기를 성인의 학문이라는 것은 인륜을 가장 중요시하기 때문에 그 밖의 오묘한 진리에 대하여는 말하지 않았다. 선교와 불교 또한 대동소이하다”고 하였다.

 

계곡 선생 장유가 선생의 시집에 서문을 썼는데 거기서 “학문과 덕행이 있으면서 숨어사는 선비로서 중청과 중권에 비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선생과 고옥이로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공은 태어날 때부터 신령스럽고 특이하였으며 널리 유·불·선 3교에 널리 통하였는데 이것을 서로 비슷한 도로 수습하여 그 이치를 깨우쳐 선을 터득하였으나 인륜 강상과 행동은 한결같이 우리 유도를 근본으로 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어렸을 때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 갔는데 중국 사람들을 보고는 중국말로 응대하였으며 외국의 사신을 만나면 외국어로써 말하였다. 일찍이 산에 들어가 며칠 동안 마음을 가다듬고 수양한 후에 내려오면 산아래 100리 사이의 모든 일은 눈으로 보는 것같이 훤하게 알곤 하였다”고 하였다.

 

또 해숭위) 윤신지가 쓴 서문에는 “내가 어렸을 때 이미 동국에 진인 정북창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정유의 난에 고옥(정렴 동생 정작) 선생을 돌아오는 길에서 만났는데, 때에 선생은 늙은 학의 형상으로 은빛머리를 휘날리고 있어 완연히 신선이었고 사람의 마음속을 꿰뚫어 보니 그 모양이 득도한 사람임에 분명하였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탄식하며 일어서서 경의를 표하였다. 선생께서 말하기를 ‘그대는 나를 진인으로 보았는가? 애석하도다. 그대는 나의 북창 형을 보지 못하였구나!’ 하였다. 이날 나는 고옥선생으로부터 선생의 풍신·의표·기험 등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내가 모르는 여러 가지 사실들을 들었다. 마침내 나는 선생이 신선과도 더불고 부처와도 더불며 또 성인과도 더부는 것을 알았다. 이런 분을 일러 가히 진인이라 할 수 있지 아니할까? 만약에 선생이 이러한 특이한 식견으로 끝까지 선교와 불교에 물들지 않고 오로지 우리 유도로서 본관을 삼아 유훈을 받들고 효제에 오로지 힘써 『소학』과 『근사록』으로써 초학을 삼아 순순히 유교의 가르침에만 열심하였다면 어찌 고금에 찾아볼 수 없는 탁절한 선경에 이를 수 있었겠는가” 하였다.

 

참판 성수익이 편찬한 『삼현주옥』에서는 “북창 선생의 세상일에 관여하지 않음은 신인이다. 일찍이 중국에 갔을 때 유구(오끼나와)의 사신을 만났는데 사신 역시 특이한 사람이었다. 한 번 북창 선생을 보고는 소스라치게 크게 놀라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래로 내려가 절을 올리고 그가 가지고 있는 조그마한 책자에 기록된 ‘모년 모월 모시에 중국에 들어가면서 진인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란 글을 보이면서 북창 선생에게 말하기를 ‘바로 진인이란 공이 아니고 누구겠는가’ 하였다. 그 사람은 역학에 정통한 사람이었다. 북창 선생과 더불어 역을 논하는데 통역을 기다리지 않고 북창 선생은 유창한 그 나라 말로 ‘노자가 말한 바 집밖으로 나가지 않고 천하의 일을 모두 알았다’는 것은 빈 말이 아니다”고 하였다. 허목이 저술한 『기언』이란 책에 청사전이 있는데 여기에서 그 내용은 부군과 고옥의 사적을 대부분 기술한 것이다. 고옥은 즉 부군의 넷째 동생인 작의 호이다.

 

부군은 2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지복·지림이고 딸은 김윤신에게 출가하였다. 지림은 단지 1녀만 두었는데 권정기에게 출가하였다. 김윤신은 후사가 없다. 지복은 종제인 총계당 지승의 아들 시를 양자로 하여 후사를 이었는데 벼슬이 찰방이었다. 찰방도 자식이 없으니 좌랑을 지내고 참판으로 증직받은 맏형 회의 아들인 인경을 후사로 하였는데 벼슬이 승지에 이르렀다. 승지는 3남을 두었는 바 장자는 순양이고 참판을 증직받았고, 차남은 정양인데 현감을 지내고 참의를 증직받았으며, 3남은 이양으로 참의를 증직받았다. 순양의 아들 수연은 현감으로 판서를 증직받았고 3남을 두었는데, 장남 광은은 사서를 지내고 참판을 증직받았고 차남 광주는 군수이며 3남 광한은 판서이다. 광은의 아들 창성은 감사이며 창순은 대사헌이요, 광한의 아들 창노는 참봉이고 창기는 광주의 양자로 나갔다. 창성의 아들은 돈시·경시이고 창순은 경시를 취하여 양자로 하였고, 정양의 아들 수곤은 찰방을 지냈다. 수곤의 아들로서 광겸은 군수를 지내 참의를 증직받았고, 광익은 주서를 증직받았으며, 광충은 대사헌을 지냈다. 광겸의 아들로서 장남은 창언이고 차남 창유는 군수를 지내고 참판으로 증직되었으며, 3남 창사는 참판을 증직받았다. 창유의 아들로서 원시는 감사를 지냈고, 민시는 참판을 지냈는데 창사의 후사로 나갔다. 원시의 아들은 상필·상우이다. 수륜은 일양의 양자로 나갔으나 자식이 없어 광충을 취하여 후사를 이었는데 그 소생으로 창조는 부솔이고 창기는 좌랑인데 광익의 후사로 나갔다. 창조의 아들은 만시이고 수강의 아들은 광언·광운·광헌인데 광헌은 봉사를 지냈다. 광언의 아들은 창원이고 광헌의 아들 창후는 진사를 지냈고 광운의 양자로 나가 그 후사를 이었다.

 

오호라! 지금은 부군께서 돌아가신지 250여 년이나 되었도다. 초동, 마졸들도 아직껏 정북창 이름 세 자를 알고 있는데 선생의 행장을 후대에 전하여 영원토록 함이 그 도리일 것이니 어찌 다시 구구하게 달리 때를 기다리겠는가? 돌을 깎아 공의 행장을 비석에 새기지 않는다면 비록 평소 공을 경모하는 사람들일지라도 어찌 정확히 공의 행적을 알 수 있으리요. 무릇 의복과 신발을 소장하고 그 산에 제사 지내며 우러러본다고 해서 성의를 다하는 것인가? 소자가 이에 삼가 제현들이 기록한 내용 중에서 믿을 수 있고 논증 할 수 있는 것만을 골라 뽑아 이를 음기로 하는 바이다.

 

6대손 정헌대부 예조 판서 겸 지 경연사 광한이 삼가 글을 짓고,

8대손 가선대부 이조 참판 겸 규장각 직제학 민시가 삼가 글을 쓰다.

지금 임금 3년(1779, 정조 3) 기해 월 일에 세우다.

 

 

 

 

'삶의향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산  (0) 2018.08.28
최인철 교수, 굿라이프  (0) 2018.07.06
그리움  (0) 2018.01.23
와이로(蛙利鷺)  (0) 2018.01.12
12월의 독백  (0) 2017.1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