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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향기

상산초옹과 유비

by 라폴리아 2023. 12. 23.

공손찬과 눈물로 헤어진 유비는 서둘러 탁현 누상촌으로 향했다. 노식이 초당을 세운 역수는 탁군 안고현 땅이어서 누상촌까지는 빠른 걸음으로도 해질녘에나 닿을까 말까 한 거리였다. 스승을 배웅하고 공손찬과 헤어지는데 너무 많은 시간이 지체되어 벌써 해가 중천에 솟은 때문이었다.
얼마를 가다 보니 제법 넓은 개울이 앞을 가로막았다. 적어도 50장은 되는 너비에 두 자 깊이는 되어 보였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징검다리 하나 보이지 않았다. 할수없이 유비는 신을 벗고 바지를 걷은 채 물을 건너기 시작했다. 북쪽인데다 9월도 이미 중순을 지난지라 물이 몹시 찼다. 거기다가 물 가운데는 보기보다 깊어 내를 건넌 유비의 아랫도리는 물에 흠뻑 젖어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불이라도 피워 떨리는 몸을 녹이고 젖은 옷을 말린 뒤에 떠나고 싶었지만 갈 길이 바빠 그럴 시간도 없었다. 그래서 젖은 바지를 입은 채 다시 길을 떠나려 할 때였다. 누군가가 부른 것 같아 뒤를 돌아보니 냇물 저쪽에서 한 노인이 유비를 부르고 있었다.
"섰거라. 귀 큰 어린 놈아"
겨우 알아들을 만큼 작았지만 귀담아 들으니 이상하게도 또렷하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허름한 차림에 명아주 지팡이를 짚은 노인이였는데, 별나게 희고 긴 수염에도 불구하고 별로 기억에 없는 모습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미 혼례까지 치른 자신을 어린 놈이라고 함부로 불러대는 것도 그리 탐탁치 않았지만, 워낙 나이가 든 노인이라 유비는 할수없이 큰 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어르신"
"다리도 없고 배도 없는데 이 늙은 것이 어떻게 내를 건너란 말이냐? 네놈이라도 업어서 건너다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마치 유비가 다리를 부수고 배를 없애버리기라도 한 듯한 말투였다. 그같은 늙은이의 말투가 다시 귀에 거슬렸으나 유비는 말없이 건너온 냇물로 다시 들어갔다. 상대는 노인인데다 자신은 이미 젖은 몸이었다. 너무도 당당한 그 노인의 요구도 예사롭지 않았다. 거기에는 반드시 어떤 까닭이 있을 것 같은 예감이었다.
한 번 젖은 몸이어서인지 물은 한층 더 차갑게 느껴졌다. 그러나 유지는 낯빛도 변하지 않고 건너가 하인이라도 부리는 듯한 그 노인을 등쳐 업었다. 보기보다 무거움 노인이었다. 또래에서늠 힘깨나 쓰는 유비였지만 개울을 다 건넜을 때는 다리가 후들거릴 지경이었다. 그런데 더 기막힌 것은 그 노인을 개울가에 내려놓음 뒤였다.
"이런 내 정신 보게. 보퉁이를 저쪽에 두고 왔구나. 네놈을 부르는 데 급해서 그만...."
거친 숨을 내쉬고 있는 유비에게 고맙다는 인사는 커녕 다시 나무라는 투로 하는 말이었다. 그제서야 유비는 노인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흔한 유건 하나 쓰지 않은 누더기 차림이었지만 어쩐지 민촌의 무지렁뱅이 늙은이 같지는 않았다. 이따끔씩 스승 노식의 초당을 찾곤 하던 이름 모를 은사들에게서 느껴지던 분위기 같은 것이 이 노인에게서도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때 노인이 다시 꾸짖듯이 소리쳤다.
"이런 멍청한 녀석 같으니. 너늠 내가 보퉁이를 두고 왔다는 말을 듣지 못했느냐?"
"예. 다녀오겠습니다"
유비가 얼결에 그렇게 대답했다. 노인은 한층 큰소리로 나무랐다.
"네가 어딜 가서 찾는단 말이냐. 잔말 말고 나를 업어라"
이 말에 어지간한 유비도 은근히 부아가 일었다. 일부러 사람을 괴롭히려 드는 듯한 느낌 때문이었다. 더기다가 더 이상 이곳에서 지체하다가는 저물기 전에 집으로 돌아갈 수 없을 만큼 갈 길도 바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비는 다시 말없이 그 노인을 업었다. 그냥 떠나버리면 이미 한 수고까지 없어져 버리지만 한번 더 다녀오면 그 수고는 두배로 남게 된다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달랜 것이다.
다행히 그 노인은 한번 더 냇물을 건너갔다 오는 것으로 더는 유비를 괴럽히려 하지 않았다. 내를 건너 와 등에서 내려놓자 노인은 마른 풀 위에 털썩 앉으며 좀 전과 달리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유비라고 합니다"
"좋은 상이다"
"무슨 말씀이신지...."
"만 가지 상 중에서도 심상이 제일 중하다는 뜻이다"
노인은 그렇게 말하더니 갑자기 험한 눈길로 다그쳤다.
"네 놈이 혹시 나를 황석선생 쯤으로 넘겨짚은 거 아니냐? 그리하여 장자방처럼 天書라도 얻어걸릴까 하여 내게 이리 인심을 쓴 것이렸다?"
물론 유비도 황석공과 장량의 옛일을 알고 있었다. 황석공이 다리 위에서 두 번이나 벗어 던진 신을 주워 주었다는 장량을 흉내낸 건 결코 아니었다. 유비가 부드럽게 웃으며 받았다.
"옛일은 옛일일 뿐입니다. 시대가 다르고 사람이 다른데 어찌 같은 일이 되풀이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너는 왜 두번이나 나를 업고 내를 건널 생각을 했느냐? 무엇을 바라고 한번 더 수고로움을 참았거냐?"
노인은 다시 살피는 눈길로 돌아가 유비를 쏘아보며 물었다. 그제서야 유비도 그 노인의 눈빛이 심상치 않음을 알아보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잃어버리는 것과 두 배로 늘어나는 차이 때문입니다. 제가 두번째 건너기를 마다하면 첫번째 수고로움마저 값을 잃게 됩니다. 그러나 한번 더 건너면 앞의 수고로움도 두 배로 셈쳐 받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노인의 눈에서 한층 강한 빛이 뿜어나왔다.
"네 나이 올해 몇이냐?"
"열일곱입니다"
"벌써 그걸 알고 있다니 무서운 아이로구나"
"예...?
"그게 바로 개 같은 선비들이 입만 열면 말하는 인의의 본체다. 그렇게 빚을 주면 빚진 자는 열배를 갚고도 아직 모자란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다른 사람을 부리려 들면 그 사람은 목숨을 돌보지 않고 일하게 된다"
"...."
"나도 네게 빚을 졌으니 호된 값을 물어야겠구나"
"그런 뜻이 아니옵고...."
"하나 일러주마. 그걸 쓸 때는 네가 그걸 쓰고 있다는 걸 남이 알게 해서는 안된다"
"저는 저 자신도 그걸 잊고자 합니다"
"거기까지...."
그렇게 말하며 다시 한번 유비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노인의 눈에서는 불꽃이 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뜨거운 차 한 잔을 마실 만한 시간이 거의 지난 뒤에야 목소리를 가다듬어 물었다.
"어디 사느냐?"
"탁현 누상촌에 삽니다"
"그렇다면 탁록정후의 후예겠구나. 누구에게 배웠느냐?"
"노식 선생님의 문하에 잠깐 있었습니다만...."
"노자간. 머릿속에는 귀신들의 말과 고집만 잔뜩 들어있는 그 되다 만 작자가 널 길렀다고?"
노인은 아무래도 못 믿겠다는 듯이 그렇게 되물었다. 나이는 줄잡아 십여년 차이가 나 보이지만, 말투로 미루어 보면 스승 노식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유비는 노인의 뜻을 거스르지 않기를 잘했다고 생각하면서 공손히 물었다.
"스승님을 잘 아십니까?"
"알지. 더벅머리로 책을 끼고 마융 늙은이의 문하를 드나들 때부터 알고 있다. 실은 오늘도 그 작자를 만나러 갔다가 허탕치고 오는 길이야"
"스승님은 아침 일찍 여강으로 떠나셨습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바로 그걸 말리려고 멀리서 달려왔는데 한 발 늦었다. 너는 태뢰의 소를 아느냐?"
"예"
"뿔이 곧고 잡털이 섞이지 않은 소를 골라 콩을 먹이고 비단으로 소를 치장함은 그 소를 위해서가 아니다. 나라의 제사에 그 고기를 쓰고자 함이니, 어리석은 소는 백정의 도끼가 정수리에 떨어질 때에야 비로소 슬퍼한다. 벼슬도 그와 같으니, 내 그걸 말리려고 그를 찾은 것이다"
"사람이 학문을 닦음은 장사치가 귀한 구슬을 구해 살 사람을 기다리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세상을 위해 쓰지 않을 바에야 학문을 닦아 무얼 하겠습니까"
"으음, 노자간(노식)의 머리에 가득 들어 있던 죽은 사람들의 말과 글이 어느새 너에게도 옮았구나"
그러더니 노인은 다시 한번 유비의 얼굴을 구석구섣 뜯어보았다. 그걸  통해서 유비의 지난 날과 앞일을 한꺼번에 알아내겠다는 듯한 세밀한 눈길이었다.
"아깝구나. 허지만 사람은 저마다 정해진 길이 있으니 오쩌겠느냐? 同德과 千放이 멀다면 요순의 가르침도 세상을 위한 한 가닥 길은 되리라"
노인은 그렇게 탄식했다. 노식 아래서 유가의 글밖에 읽은 적이 없는 어린 유비에게는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그러나 노인은 유비가 무엇을 물을 틈을 주지 않고 갑자기 어조를 바꾸어 유비에게 물었다.
"그래 이제 네가 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이냐?"
"장부가 품은 뜻 중에 제세안민보다 더 큰 것이 있겠습니까? 어지러운 천하를 바로잡고 백성을 편안케하는 것이 제 뜻입니다"
"무엇으로 그 뜻을 이루겠느냐?"
"우선은 새로운 스승을 구해 부족한 배움을 이으면서 천천히 생각해 보겠습니다. 다행히 스승님께서 떠나시면서 북해의 정현 선생께 저를 천거해 주셨습니다"
"그 다음은 묘당에 높이 올라 큰 관과 긴 수염을 쓰다듬으며, 위로는 예악을 말하고 아래로는 5형으로 다스릴 작정인가?"
"이 유비 비록 아는 바는 없으나 어지러운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평안케 하는 길이 어찌 예악과 5형 뿐이겠습니까? 하지만 반드시 그 길 뿐이라면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내 짐작이 맞다면 너는 한실의 종친이다.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우리 한조를 일으키고 키우신 열성의 피가 제 몸에도 흐르고 있음이니 잠시라도 가볍게 여길 수 있겠습니까? 비록 몸은 궁벽한 곳에 영락해 있으나 마음은 금문 안에 있듯 높게 가지라는 어머님의 말씀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 유비의 말에 노인은 빙긋 웃고 일어나며 말했다.
"이제 잠시 네 등을 빌린 값을 하게 되었다. 가자"
그 노인이 영문을 몰라 얼떨떨한 유비를 데리고 간 곳은 거기서 멀지 않은 마을 입새의 고목 아래였다.
"너는 이미 말을 많이 하면 마음이 빈다는 걸 알고 있다. 이제 나도 말을 아껴야겠다"
노인은 그렇게 말한 뒤 머리 위의 고목을 가리켰다.
"지금 내가 너에게 하려는 말은 이 고목의 몸으로 다하고 있다. 네 마음의 귀로 들어보아라. 그럼 나는 길이 바빠 가봐야겠다"
그 말에 유비는 나무를 한번 올려다 볼 겨를도 없이 떠나려는 노인에게 물었다.
"어르신의 크신 이름은 어떻게 되옵니까?"
"칡뿌리나 캐고 고사리나 꺽으면서 산골에 숨어사는 늙은이에게 무슴 이름이 있겠느냐? 뒷말 네 스승을 만나거든 상산의 한 나무꾼 늙은이라고 하면 된다"
말을 마친 노인은 그대로 휘적휘적 제 갈 길을 떠나갔다. 아직도 미진한 유비가 무어라고 말하며 뒤따르려 하자, 노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한마디를 덧붙였다.
"이 귀 큰 어린 놈아, 셈은 끝났다"
그제서야 유비도 따라가 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느끼고 그 노인이 가리킨 나무 쪽으로 돌아섰다.
 
넉넉히 세 아름은 됨직한 나무는 줄잡아 3백년은 넘게 보이는 고목이었지만 마을 입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나무였다.
유비는 약간 실망이 되었으나 아무래도 그 노인이 실없는 소리를 한 것 같지는 않아 찬찬히 그 나무를 살피기 시작했다. 높이가 열 丈쯤 되어보이는 나무는 너무 오래된 탓인지 높은 곳의 가지들은 이미 말라 죽어 있었고, 단풍진 잎이 붙어 있는 가지는 채 절반이 안되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가지들도 한결같지는 않았다. 어떤 가지는 이미 반쯤이 검게 썩은 잎들로 지저분했고, 어떤 가지는 노랗게 단풍이 잘든 잎으로 아름다웠다. 고목 줄기에서 뻗은 가지와 새로 돋은 가지의 차이였다. 하지만, 그걸로 그 뿐, 아무리 올려다보아도 그 노인이 고목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는 얼른 짐작이 가지 않았다.
제법 따뜻하긴 해도 역시 늦가을 볕이라 그런지 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서 있자 젖은 몸이 차차 떨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비는 꼼짝도 않고 서서 그 고목을 응시했다. 마음속으로는 그 노인과 나누었던 대화들을 처음부터 차근차근 되새기면서.
그렇게 한 식경이나 지났을 무렵이었다. 얼어붙은 듯 서 있던 유비가 갑자기 엄숙한 표정을 지나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품안을 더듬어서 서찰 한 통을 꺼내서는 망설임없이 찢어 버렸다. 전날 스승 노식이 그를 위하여 정현에게 쓴 추전장이었다.
뛰듯이 집으로 달려가던 유비가 딱 한번 걸음을 멈춘 것은 고향집 앞의 큰 뽕나무 앞에서였다.(이하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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