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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ㅣ자연ㅣ뉴스

좋은 삶

by 라폴리아 2020. 2. 24.

좋은 삶, 충돌하는 욕망 어떻게 조율하느냐에 달려

[중앙일보] 2020.2.20. 20면 김기현 서울대 철학과 교수 “김기현 철학이 삶을 묻다”

 

[좋은 삶에 대한 인간의 욕망에는 쾌락·명예·윤리·헌신 등 섞여 있어 선택에 따라 다양한 모습 그려질 것. 철학여행, 우리 삶의 성찰 계기 되길....]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질문이 나오면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려는 고리타분한 도덕주의자의 훈계를 예상하게 된다. 개성대로 살고, 가치관이 부딪칠 때는 서로 인정하고 타협하며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대세인 시대를 살고 있다. 그래서인지 자신의 가치관을 고집하며 상대방을 설득하려는 모습은 교양이 없어 보이기도 한다.

 

생각과 가치관의 충돌은 한 사람 속에서도 생긴다. 내 마음을 들여다보면 감각적·동물적 본능에서부터 명예욕, 사회적 의무, 이타심, 신앙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욕망과 의무들이 서로 얽혀 어수선하다. 때로는 서로 부딪치며 갈등하여 마음을 찢는다. 담배를 피우고 싶은 욕망과 끊고 싶다는 욕구가 충돌하고, 여유롭게 숨을 돌리고 싶은 욕망과 아이를 돌봐야 하는 의무가 충돌한다.

 

이런 갈등은 나의 마음이라는 한 공간에서 생겨나기에 ‘너는 너고 나는 나다’라는 식으로 얼버무리고 넘어갈 수 없다. 어떻게 조율하고 균형을 잡을 것인지를 미루면 당장 오늘내일 피해를 볼 수도 있고 일생에 거친 회한이 될 수도 있다.

 

‘철학이 삶을 묻다’는 철학자들의 사상을 되돌아보며, 어떻게 마음의 주인이 되어 좋은 삶을 가꾸어 갈 것인가를 모색한다. 철학자들이 좋은 삶을 이야기할 때 흔히 거론되는 욕망을 살펴보며 앞으로의 여정을 준비해보자. 철학자마다 거론하는 욕망의 목록이 다르고, 강조점도 다르다는 것을 유념하면서.

 

[쾌락과 성취를 추구하는 마음]

마음이 세상을 만나는 입구에 감각이 있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쾌감을 느끼고, 뜨거운 것을 만지면 고통을 느낀다. 진화생물학자들은 해로운 것을 피하고 유익한 것을 추구하여 종의 번식에 도움이 되게 하려는 자연의 조화가 쾌감과 통증을 만들었다고 한다. 진화적인 연유에서든 어떻든 쾌락 추구와 고통 회피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로 자리 잡았다.

 

잘 사는 사람 하면 돈 많은 부자가 떠오르는 것도 쾌감의 추구 때문이다. 돈은 많은 것을 가능하게 한다. 가난한 이들을 도울 수 있고, 책을 사서 영혼을 살찌게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부자를 부러워하며 주로 상상하는 것은 이런 일이 아니라, 먹고 싶은 것을 맘껏 먹고 비싼 집에서 살고 원할 때 자유로이 해외를 드나들며 멋진 곳에서 쾌적한 시간을 갖는 일이다. 삶의 목적을 감각적 즐거움과 연관시키는 쾌락주의다. 쾌락주의는 자주 비판의 대상이 되지만, 그것은 감각을 만족시키려는 우리의 욕망이 그만큼 강하다는 것을 반증한다.

 

언어란 기묘하다. ‘잘 산다’라는 말은 부사와 동사가 결합한 표현인데, 이것을 형용사와 명사로 바꾸면 ‘좋은 삶’이 된다. ‘어떤 삶이 좋은 삶인가?’라고 물으면 돈과 쾌감에 묶였던 우리의 시야가 넓어진다. 마음은 감각을 통하여 세상으로부터 영향을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있지 않은 것에 대하여 꿈을 꾸고 세상을 변화시킨다. 이 부분이 좋은 삶과 무관할 리가 없다.

 

20세기 최고 철학자로 꼽히는 비트겐슈타인은 굴곡진 삶을 살았다. 철강 부호의 막내아들로 태어났지만, 네 형 중 세 명의 자살을 겪으며 자신도 언젠가 자살할 것이라는 불안감에 젊은 날을 보낸다. 동성애자로서 또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로 평생을 고립과 어둠 속에서 보낸 후에 자신을 돌보던 의사의 구석진 방에서 쓸쓸히 삶을 마감한다. 의사가 이제 며칠 남지 않았다고 하자 비트겐슈타인은 “좋습니다. 나는 멋진 삶을 살았다고 사람들에게 전해주시오”라고 말한다. 즐거움과 쾌적함이 없는 그의 삶을 부러워할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이 의미를 부여한 철학에 매진하여 최고의 명예를 성취한 삶을 한편의 훌륭한 삶으로 존경할 준비는 되어 있다.

 

[공감을 통한 윤리와 희생]

내가 좋은 삶을 사는지는 어떻게 느끼고, 무엇을 이루었는가와 같이 한 개인의 울타리 내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의해서만 결정되지 않는다. 이웃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도 삶의 질을 결정하는 데에 한몫한다.

 

드라마와 영화를 보면 주변 사람을 이용하며 성공한 악인이 때로 조연으로 등장한다. 비윤리적인 사람이 윤택하고 사회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누리는 것에 분노하고, 이용당하는 선한 주인공을 안타깝게 응원한다. 악인을 경멸하는 이유는 비윤리적 행동 때문만이 아니다. 공감이 결여된 빈곤한 삶이라는 판단 역시 작용한다. 공감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느끼게 하면서 나의 감각의 영역을 외부로 확대한다. 윤리가 생겨나는 영양분을 제공하지만, 그 자체로 삶을 풍요롭게 한다. 공감이 결여된 채 자신의 감각과 목적 추구에만 몰두하는 소시오패스의 삶이 황폐한 이유다.

 

좋은 삶에 대한 생각이 이웃과의 관계를 고려하기 시작하면 그 범위가 사회적 규범과 윤리를 넘어 확대된다. 사람들은 죽음을 앞두고서는 다른 이들에게 베풀며 살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고 한다.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면서 사는 자신의 현실 건너편에 있는 이상이 마지막 순간에 의식의 표면으로 떠오르는 것일까. 공감이 윤리의 차원을 넘어서 헌신과 희생으로 확장될 때, 우리는 감동하고 박수를 보낸다.

 

[초월을 지향하는 예술과 종교]

우리는 때로 삶의 유한성을 자각하면서 쾌락과 명예, 그리고 관계와 윤리 너머에 무엇이 있는가를 꿈꾼다. 어떤 이들은 예술이 그런 동경의 산물이라고 한다. 청력을 잃어가며 자살을 생각하던 베토벤은 인류에 남겨주어야 할 유산이 있음을 깨닫고 마음을 돌이킨다. 인간의 오욕칠정을 넘어선 영원한 가치, 음악으로만 표현될 수 있는 초월적 숭고함에 대한 추구가 그를 자살로 가지 못하게 했으리라.

 

영원성에 대한 동경은 종교로 이어지기도 한다. 절대자 또는 영원한 진리를 찾아 구도의 길을 떠나는 수도자의 삶을, 사자에 찢기는 육신의 고통을 감내하면서 신을 찬미하는 순교자의 삶을 우리는 경외의 눈으로 바라본다. 가변적이고 유한한 삶 너머의 절대적 가치를 추구하게 되면, 삶의 의미는 그로부터의 거리로 가늠된다.

 

[철학자들이 들려주는 삶]

좋은 삶에 대한 욕망에는 쾌락·명예·윤리·헌신 등의 여러 재료가 섞여 있다. 다른 재료들이 더 있을 수 있고, 사람마다 택하는 재료가 달라 다양한 삶의 모습들이 그려진다. 재료들을 단순히 혼합한다고 좋은 삶에 대한 그림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어떤 두 재료를 택하든 부딪치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고, 재료가 추가되면 이들을 조율하는 셈법은 더욱 복잡해진다.

 

철학자들은 산재한 욕망을 어떻게 조율하여 삶의 주인이 될지 고민해왔다. 마음과 삶에 대한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살펴보는 작업을 시작하고자 한다. 필자가 동양철학에 과문하여 서양 철학자들을 소개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인간의 본성은 동서양에 공통적이라는 추정을 위로로 삼고, 학문을 더 쌓아 동양 철학자들의 생각도 소개할 수 있는 때가 오기를 기대하면서.

 

서양철학의 역사를 보면, 이성이 삶의 조화를 위한 지휘대에 가장 많이 오른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 대표되는 고대의 철학은 이성의 철학이었으며, 이후 칸트에 의해서도 소환되어 철학의 역사를 관통하여 압도적인 영향을 발휘한다. 고대가 막을 내리는 혼란기에 즈음하여서는 절대자의 은총과 신앙이 무대에 오르며 이후 천 년을 지배한다.

 

중세의 두 거목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는 절대자에 귀의하는 의지를 중심에 올려놓았지만 이성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근대와 더불어 개인이 해방되면서는 이성과 신앙에 의하여 절제됐던 쾌락이 새로운 조명을 받는다. 홉스와 벤담은 새로운 시대를 적극적으로 포용하여 마음을 해석한다. 19세기의 새로운 과학, 특히 다윈의 생물학과 프로이트 심리학에서 신앙과 이성은 더욱 심각한 도전에 직면한다. 니체는 그 도전의 정점에 선다.

 

이상의 철학자들과 현대의 사상가들을 4주에 한 번씩 소개할 계획이다. 이들은 자신의 시대로부터 어떤 키워드를 받았고, 이를 통해 마음과 삶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했을까? 이 질문을 쫓아가는 철학적 시간여행이 삶에 대한 생각의 시대적 변화를 추적해 오늘의 시대를 되돌아보는 기회가 되고, 또 각자의 삶을 성찰하는 기회도 될 수 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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