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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기타

이다 프레스티 Duo

by 라폴리아 2019. 3. 7.

이다 프레스티 & 알렉산더 라고야 듀오에 대하여

 

이다 프레스티(Ida Presti,1924-1967)와 알렉산더 라고야(Alexandre Lagoya,1929-1999)는 참으로 이상적인 기타 듀오였다. 테크닉에 있어서도 둘은 뛰어났지만, 음악성에서도 탁월했고, 기타 듀오의 레퍼토리 확대를 위해서 다양한 편곡을 시도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인 연주자들이기도 하다. 이다 프레스티마리아 루이사 아니도, 루이제 발커와 함께 20세기 세계 3대 여성 기타리스트로 손꼽힌다.

 

이탈리아와 희랍의 혈통을 지닌 라고야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출신이다. 19살 무렵에 이미 중동지역에서만 500회가 넘는 연주회를 소화시켰을 만큼 직업 기타리스트로 꽤 유명했다. 그러나 보다 성장하기 위해서는 유럽으로 가서 더 배워야한다고 생각하고 21살 때 이탈리아의 시에나(Sienna)로 가서 세고비아의 문하에 들어간다. 이어서 파리로 가서 쟝 사우드리에게 기타를, 빌라 로보스에게 화성학과 대위법을 사사했다. 이 무렵 프레스티를 만났다. 세고비아가 끔찍이도 아끼는 제자였던 그녀는 이미 파리에서도 유명한 기타리스트였다. 이미 대단한 경지에 올라와 있었고, 그런 이다를 세고비아는 이다 프레스티씨모('Ida Prestissimo)”라고 불렀다.

 

프레스티는 악보 없이 즉흥으로 연주하기를 좋아했고, 알렉산드레 라고야가 소르(Sor)의 연습곡 가운데 하나를 택해 만든 변주곡의 세 번 째 멜로디를 즉흥적으로 멋지게 연주해서 라고야를 놀라게 한 적도 있었다. 둘은 급속하게 가까워졌고, 결혼했다. 이후 1967년에 이다 프레스티가 사망할 때까지 17년간 세계 최고의 기타 듀오로 눈부신 활약을 했다. 그들의 이중주 연주는 대단한 인기를 모았고, 프레스티는 작곡에도 재주가 있어서 '헝가리 여인' ‘변덕스런 연습곡' 등 많은 곡을 작곡했다.

 

그러나, 그 시절만 해도 기타라는 악기는 서민들의 악기 정도로 치부됐었고, 더군다나 기타 듀오는 너무도 생소했었다. 대부분의 솔리스트들조차 전문연주자로 터를 닦는데 고전을 하고 있을 때, 이들은 듀오를 했으니 그 어려움도 더 컸다게다가 그들은 연주회에서 소화시킬 듀오 레퍼토리가 절실하게 필요했다. 기타 듀오를 위해서 작곡된 작품은 어차피 극히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바흐, 스카를랏티, 드뷔시, 파야, 그라나도스, 하이든 등 수많은 작곡가들의 작품들을 기타 듀오로 편곡하는 작업에 매달렸다고맙게도 세고비아가 이 부부를 돕고 나섰다. 이들이 뉴욕에서 데뷔 연주회를 열었을 때 작곡가 카스텔누오보 테데스코에게 의뢰해서 기타 듀오를 위한 ‘24개의 전주곡과 푸가를 쓰게했다. 테데스코는 듀오를 위한 협주곡도 작곡해서 이 부부에게 주었다.

 

앙드레 졸리베(Andre Jolivet), 삐에르 쁘띠뜨(Pierre Petit), 모레노 토로바(Federico Moreno Torroba), 로드리고 등 많은 작곡가들이 이 부부를 위해 많은 기타 듀오 곡을 썼다. 그 결과 1952년부터 1967년까지 그들은 2천회가 넘는 연주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1967, 프레스티가 폐암으로 인한 내출혈을 일으켜 뉴욕에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그 후 32년간 알렉산드레는 홀로 연주생활을 계속했다. 니스 음악원과 파리 국립음악원의 교수를 지냈고, 1994년에 은퇴했다. 라고야가 솔로로 연주활동을 다시 시작한 것은 아내가 죽고나서 5년이나 지나서였다. 라고야의 음악은 지중해를 닮은 명쾌하고 순수함이 특징이다. 또한 그의 연주는 '기타의 귀족'이라는 별칭만큼 우아하고 침착하다. 라고야는 세고비아와 동시대의 인물로 스페인 기타음악의 순수성을 유지시키고 계승했다. 또한 철저한 자기수련을 통해 고도의 기교를 유지한 것은 오랫동안 후학들의 귀감이 되어왔다.

 

이다 프레스티는 1924년 프랑스 출생. 6세 때 부친에게 기타를 배우기 시작하여 10세 때 파리에서 첫 리사이틀을 가져 천재 소녀라는 극찬을 받았다. 그녀가 13세 되던 해(1938),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죽고 어머니와 3살된 여동생을 돌보면서 생활을 꾸려 나가야만 했다. 그 후 전쟁과 힘든 고난의 순간들을 겪었다.

1943, 19세 때 앙리 리고드(Henry Rigaud)와 결혼하고 1년 뒤, 딸 엘리자베스를 낳았다. 남프랑스에 살았고 가끔 정부기관을 위한 연주회를 준비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정기적인 연습은 하지 못했지만 종종 새벽 2-3시까지 짚시 친구들과 기타를 치며 어울렸다. 또한 프레스티는 아주 맑고 고운 목소리와 초고음 소프라노의 음성을 지녔고, 파리의 가보(Gaveau)홀에서 노래하기도 했다.

 

세계 제2차 대전 후, 20세의 프레스티는 `여성 모차르트`라는 칭호로 불려졌고, 프랑스, 이탈리아, 폴란드, 독일, 마르코, 인도네시아, 영국 등지로 연주 여행하였다. 그녀의 아랑훼즈 협주곡은 라디오 방송에서 자주 방송되었고, 30대 초반에 알렉산더 라고야와의 사이에서 두 번째 딸 실뱅(Sylvain)을 낳았다.

 

알렉산더 라고야와의 이중주는 역사적인 그야말로 전설적인 업적을 남겨 오늘날 '아사드 형제' 등 많은 이중주단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또한 그녀의 교수법은 매우 열정적이었다. 마치 흐르는 샘과 같은 풍부한 상상력과 표현력을 배우는 학생들로부터 표출할 수 있도록 각자 알맞은 운지와 각 음절마다에 음악적 실험과 관찰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녀는 연주여행 도중 맞은 페니실린 부작용으로 객지에서 요절하여, 불과 43년밖에 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지만, 33년 동안이나 전문 기타리스트로 지냈고 그녀가 작곡한 작품들도 녹음되었다.

 

 

 

Ida Presti (1924-1967) & Alexandre Lagoya (1929-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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