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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ㅣ자연ㅣ뉴스

180316 평양의 트럼프 타워도 꿈은 아니다

by 라폴리아 2018. 3. 16.

김대중 전 대통령(DJ)한테서 직접 들은 이야기다. 2000년 6월, 평양에서 열린 최초의 남북 정상회담 때 김정일 위원장이 DJ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아버지인 김일성 주석은 중국은 주머니를 두 개 차고 있으니 항상 조심하라고 하셨다. 내 생각은 다르다. 중국이 찬 주머니는 두 개가 아니라 열 개는 된다. 통일되더라도 주한미군은 유지해야 한다는 김 대통령 말씀에 동의한다.”

  
6·25 전쟁 때 중국은 북한을 도와 미국과 싸웠다. 그럼에도 김 주석은 중국을 경계하라는 유훈을 남겼다. 그 유훈은 3대째 계승되고 있다. 손자인 김정은은 2011년 말 집권 이래 한 번도 중국을 방문하지 않았다. 중국의 최고지도자를 평양으로 초대한 적도 없다. 지난해 김정은은 시진핑의 친서를 들고 찾아온 특사를 만나주지도 않았다. 미국과 손잡고 북한을 압박하고 있는 중국에 대한 북한의 반감은 상상 이상이다.
 
핵 단추의 크기를 놓고 다투던 미국과 북한의 지도자가 이제는 누구의 담력이 센지를 놓고 겨룰 판이다. ‘리틀 로켓맨(little rocket man)’이 제안한 일대일 담판을 ‘노망난 늙은이(dotard)’는 단박에 수락했다. 번지점프대에 먼저 올라간 김정은의 ‘콜(call)’을 트럼프가 ‘오케이(OK)’로 받은 꼴이다. 깎아지른 절벽에서 북·미 정상이 나란히 뛰어내리는 ‘세기의 대결’을 조만간 전 세계가 숨죽이며 지켜보게 됐다.
 
트럼프 대통령에게 대국(大局)을 볼 줄 아는 눈이 있다면 북한의 뿌리 깊은 혐중(嫌中) 감정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트럼프는 동아시아에서 중국을 견제하고, 미국의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김정은과의 역사적 만남을 활용할 수 있다. 방법은 간단하다. 미 프로농구(NBA)의 골수팬인 김정은을 감싸안아 친미주의자로 만들면 된다. 지금부터 트럼프는 어떻게 하면 김정은을 유인해 북핵 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북한을 미국 편으로 끌어들이느냐를 고민해야 한다.
 


냉전 시절 북한은 중국과 소련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했지만 소련이 붕괴되면서 북한은 중국에 경제적으로 예속됐다. 트럼프가 북한을 과감하게 끌어안아 중국과 연결된 경제의 탯줄을 미국으로 돌려놓을 수 있다면 트럼프는 한반도와 동북아의 안보와 경제 지형을 획기적으로 바꾼 지도자로 역사에 남을 수 있다. 그러려면 북한에 밝힌 ‘4 노(No)’ 원칙을 뛰어넘어야 한다. 북한 정권의 교체도, 붕괴도, 한반도 통일의 가속화도, 38선 이북으로의 미군 이동도 하지 않겠다는 네 가지 정치적 선언을 뛰어넘는 화끈한 제안으로 북한의 경제적 미래에 대한 거부하기 힘든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핵을 완전히 포기하면 체제의 안전뿐 아니라 북한을 신흥경제의 새로운 중심지로 만들 수 있다는 원대한 구상을 김정은에게 제시할 필요가 있다. 이는 한반도 비핵화, 평화와 안정, 대화를 통한 해결이라는 중국의 ‘북핵 해결 3원칙’에 위배되지 않기 때문에 베이징도 시비를 걸기 어렵다. 이 기회에 김정은을 설득해 북한을 친미 국가로 바꿔 놓을 수 있다면 트럼프 생전에 평양에 트럼프 타워가 들어서는 것도 불가능한 꿈은 아니다.
 
북한은 지난 25년 동안 미국을 속여 왔다. 하지만 더 이상은 안 된다. 트럼프는 이전의 대통령들과는 다르다. 김정은이 밝힌 비핵화 용의가 또 한 번의 속임수로 판명된다면 그를 기다리는 것은 진짜 ‘화염과 분노’일 가능성이 크다. 트럼프의 사업가 기질과 문 대통령의 남북관계 개선 의지를 믿고 다시는 오지 않을 이 기회를 살려 북한을 정상 국가로 바꾸는 대결단을 내려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의 침착하면서도 용의주도한 운전자 역할이 없었다면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이 눈앞의 현실이 되는 오늘의 상황은 오기 어려웠다. 그렇더라도 독주해서는 오래, 멀리 못 간다. 대북 정책을 둘러싼 남남갈등 해소를 위해 야당 및 보수세력과의 대화 노력을 더욱 강화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격변의 시기에 요구되는 국민 통합을 이루는 길이다.
 
정상회담을 앞둔 트럼프와 김정은에게 실패할 여유나 사치는 없다. 성공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실패할 경우 두 사람의 개인적 위험부담은 말할 것도 없고, 한반도와 동북아는 전보다 훨씬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번지점프대에 올라선 두 사람은 서로의 절박함을 믿고 과감하게 몸을 던지기 바란다. 정상회담이 성공적으로 끝난다면 노벨평화상이 세 사람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홍석현 한반도평화만들기 이사장

[출처: 중앙일보 2018.3.16 ] [시론] 평양의 트럼프 타워도 꿈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