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문ㅣ자연ㅣ뉴스

안아주기

by 라폴리아 2017. 5. 22.

안아주기


서양문학 가운데는 성서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것들이 많다. 1962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미국 소설가 존 스타인벡의 『에덴의 동쪽』이 그 중 하나인데, 이 작품은 특히 부모와 자녀 간의 문제에 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전설적인 배우 제임스 딘이 주연한 동명 영화로 더 널리 알려진 이 소설에서 스타인벡은 한 가족의 3대에 걸친 이야기를 전개하며 인간의 선과 악 그리고 죄와 구원의 문제를 다루었다. 하지만 엘리아 카잔 감독은 소설 가운데 제 4부만을 각색하여 영화화하며 초점을 ‘거부당하는 자의 고통’에 맞추었다. 이야기는 대강 이렇다.

 

쌍둥이 형제인 아론과 칼은 매우 대조적이다. 아버지 아담을 닮은 아론은 온순하고 내성적이며 모범생이다. 그러나 남편을 버리고 가출하여 사창가를 운영하는 어머니 케티를 닮은 칼은 열정적이며 거칠다. 때문에 아담은 아론을 편애하고, 그럴수록 칼은 빗나간다. 그러던 어느 날 칼은 어머니 케티에 관한 비밀을 알게 된다. 이후 그는 아버지를 동정하고 파산한 그를 도우려고 콩 농사를 시작한다. 1차대전이 일어나 미국이 참전하자 곡식 값이 뛰어 칼은 큰돈을 번다. 추수감사절 날, 칼은 그 돈을 아버지에게 선물한다. 하지만 아담은 전쟁을 이용해 돈벌이를 했다고 칼을 꾸짖으며 거부하고, 아론의 약혼만을 선물로 받는다.
이 대목은 구약성서「창세기」4장에서 신이 아벨의 제사는 받고 카인의 제사는 거부했던 것을 재현한 것이다. 그러자 분노한 칼은 아론을 어머니 케티가 운영하는 사창가로 데리고 가서 모든 비밀을 폭로한다. 죽은 줄만 알고 있던 천사 같은 어머니에 대한 비밀을 안 아론은 충격을 받아 괴로워하다 군에 자원입대하고, 어머니 케티는 자살한다. 그 후 아론의 전사 소식이 날라 오고 아담도 쓰러진다. 칼은 아담의 임종자리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빌지만 아담은 아무 대답 없이 숨을 거둔다.

본의가 아니었지만 칼은 아버지, 어머니, 형, 그리고 결국은 자기 자신마저도 파멸로 몰고 갔다. 왜 그랬을까? 작품의 초점이 여기에 맞추어져있는데, 우리는 독일 출신 정신의학자 에리히 프롬에게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그는 『사랑의 기술』에서 한 인간의 탄생을 구약성서에 나오는 ‘실낙원 이야기’를 통해 설명했다. 프롬에 의하면, 탄생이란 인간이 모태로부터 분리되어 모든 것이 비결정적이고 불확실하며 개방적인 상황으로 추방당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미래에 확실한 것은 오직 죽음뿐이다. 정신분석학적으로 보면 모든 인간은 아담과 하와가 낙원으로부터  추방당한 것과 같은 ‘실낙원의 경험’으로부터 삶을 시작한다는 뜻이다. 때문에 인간의 무의식에는 실존적 소외감, 곧 버림받은 감정, 쓸모없음에 대한 인식, 죽을 것 같은 느낌 등이 ‘근원적으로’ 깔려있다.
그래서 프롬은 “인간의 가장 절실한 욕구는 분리 상태를 극복해 고독이라는 감옥을 떠나려는 욕구이다. 이 목적의 실현에 절대적으로 실패할 때 광기가 생긴다”라고 단정했다. 그렇다. 바로 이 때문에 모든 인간의 내면에는 그 누구와 합일하려고 하는 강렬한 욕망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거부당할 때, 그는 발광한다. 칼이 그랬다! 그럼 어떻게 해야할까?
프롬은 인간이 실존적 소외감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주술도, 섹스도, 공동체의식도, 자기몰입도 아니고, 오직 ‘사랑’이라고 주장한다. 사랑만이 인간과 인간의 진실하고 지속적인 결합을 가능케 하여 죽을 것만 같은 실존적 분리감과 고독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정신분석학적 주장도 역시 ‘사랑만이 인간과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는 성서의 내용과 일치한다. 프롬의 진단과 처방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분명하고 유익하다.
부모는 어떤 경우에도 자녀들을 거부하거나 뿌리침으로써 ‘실낙원의 경험’을 하도록 하는 언어와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들이 부모와 일체감을 갖도록, 다시 말해 ‘구원의 경험’을 갖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다. 신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듯이 오직 부모만이 이 일을 할 수 있는데, 여기에는 ‘안아주기’만 한 것이 없다. 이게 무슨 말일까?


호주 시드니 대학의 앤서니 그랜트 교수의 실험에 의하면, 포옹이 스트레스에서 분비되는 코티솔이라는 호르몬을 낮추어, 혈압을 내려주고 면역력을 높이며 심리적 불안을 감소시켜주는 효과가 있다. 또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학의 캐런 그레윈 교수에 따르면, 아침에 부부가 20초 정도만 서로 포옹하고 손을 잡아만 주어도  그렇지 않은 부부에 비해 같은 스트레스에도 절반 정도만 반응한다고 한다. 그런데 왜 그럴까? 바로 여기에 ‘안아주기’의 신비가 숨어있다.

 

우리는 앞에서 인간에게는 ‘거부당하는 것’, 특히 사랑하는 상대로부터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 바로 죽음이고, 그보다 더한 고통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프롬은 오직 인간만이 갖는 이런 실존적 고통을 ‘카인의 고통’이라 이름 지었다. 그에 의하면, 모든 시대, 모든 문화, 모든 인간의 관심은 동일한 문제, 곧 어떻게 카인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어떻게 소외감을 극복할 수 있는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과 결합할 수 있는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영화 『에덴의 동쪽』에는 칼의 역을 맡은 제임스 딘이 처절하게 울며 자기를 거부하는 아버지 아담에게 다가가 억지로 끌어안는 장면이 나온다. 하지만 아담은 그를 뿌리치며 끝내 받아드리지 않는다. 엘리아 카잔 감독은 이때 칼이 느끼는 절망과 고통을 제임스 딘이  발끝까지 늘어지는 버드나무 가지들 속에 들어가 몸을 숨기고 흐느끼는 장면으로 묘사해 전 세계 팬들의 가슴을 막막하게 했다.

그런데 칼이 버드나무 속에서 다시 걸어 나왔을 때에는 성서에서 신에게 거부당한 카인이 그랬듯이 모두를 파멸로 몰아가기 시작했다. 그가 거부당했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우리가 타인을 안아준다는 것은 그를‘받아들인다는 것’, 잠시나마 그와 ‘일체가 된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인간의 무의식에 원체험으로 깔려 있는 죽을 것만 같은 실존적 분리감과 고독에서 구원해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이 모태로부터 분리되면서부터 갖고 있는 버림받은 감정, 쓸모없음에 대한 인식, 죽을 것 같은 느낌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준다는 것을 뜻한다. 단 20초 밖에 안 걸리는 ‘안아주기’가 자신도 모르게 상대의 혈압을 내려주고 면역력을 높이며 심리적 불안을 감소시키고 스트레스를 줄여주는 것이 바로 그래서다. 자, 그렇다면 생각해보자! 부모가 자식에게 해야 할 일 가운데 ‘안아주기’보다 더 중요하고 더 우선하는 일이 있겠는가?
반대로 부모가 자식에게 해야 할 일 가운데 ‘거부하기’, ‘뿌리치기’보다 더 멀리하고 금해야할 일이 있는가? 아마 없을 것이다. 부모는 자식들을 볼 때마다 안아주어야 한다! 아무 조건 없이 안아주어야 한다! 아이가 무언가 칭찬 받을 만 한 일을 했을 때뿐 아니라, 아무 일이 없을 때에도, 심지어 꾸중 받을 만 한 일을 했을 때조차도 우선 안아주어야 한다. 이 말은 동시에 부모는 어떠한 경우에도 자식을 뿌리치거나 거부하는 언어와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안아주기’의 신비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안아주기는 자연스레 상대와 서로 끌어안은 형상을 만든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을 ‘안은 내’가 다른 사람에게 ‘안긴 나’를 만든다. 이 말은 부모가 자녀들을 안아줌으로써 그 자신도 자녀에게 안긴다는 뜻이다. 그럼으로써 자기 자신도 버림받은 감정, 쓸모없음에 대한 인식, 죽을 것 같은 느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혈압이 내려가고 면역력이 높아지며 심리적 불안이 감소되고 스트레스가 준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단 20초의 안아주기가 주는 선물이자 기적이다.

프랑스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은 이 같은 상호관계의 원리를 ‘상호주관적 매듭(le nexus intersubjeclif)’이라 이름 지었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특히 부모와 자녀는 상호주관적 매듭으로 묶여져 있다! 자식을 뿌리치는 부모가 스스로 버림받은 느낌을 갖게 되고, 자식을 받아들이고 안을 때 스스로 구원받은 감정이 생기는 것이 그래서다.
여기서 하나 물어보자! 당신이 아이를 안아주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돈이 들어서? 힘이 들어서? 시간이 없어서? 사랑이 없어서? 아마 아닐 것이다.


글/삼성의료원 사회정신건강연구소 김용규씨